짧은글 긴여운 139

침체된 신앙인을 위하여

자신의 지나간 신앙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면 그 만큼 자신 안에 처음 심겨졌던 믿음이 얼마나 잘 자라고 있을까? 또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하신 손길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는가? 이런 종류의 관심사가 있는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매미 같은 곤충을 보면 7 년을 땅 속에서 유충의 형태로 자라다가 나무로 올라와서 성충이 되는데, 여름이면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시간이 불과 열흘이라는 아주 짧은 생을 살다가 마칩니다. 이 곤충이 인격적 존재라면 스스로 얼마나 허무감을 느끼겠습니까? 7년을 어두운 땅 밑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후 불과 10일만에 생을 마감한다면... 그런데 우리들 신앙의 길도 이런 자연의 교훈들에 빗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신앙이 참..

복음을 위한 수고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그때는 복음 전파가 희귀하고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고, 복음이 제공하는 훌륭한 위로에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 하지만 그 후에, 복음이 널리 퍼지고 알려졌을 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듯이...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결코 고생을 자처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싫증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E. Elton의 골로새서 주석 중에서.. 우리는 얻은 것으로 즐거워 하기 보다는 잃은 것으로 절망하기가 훨씬 더 쉽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가까이에 있고 값없이 주어지지만 알아차리..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 If we finde that we can rejoyce and give thankes to God for ourward good things, and not for spirituall graces, it is a strong proofe that our hearts are not yet seasoned with grace.... (E. Elton, Col 1:3 commentary) 우리 삶에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영적인 것을 종교적 어떤 행위들에 직접 연결시키고 육적인 일은 그 밖의 일들이라고 판단한다면 과연 옳은 것일까?

visual illusion

얼마전 한겨레 인터넷 신문에 소개된 기사에서 NYT 인터넷판에 미군들이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아프간에서 이긴다?'라는 제목으로 흥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NYT 홈으로 찾아서 가봤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복잡한 아프간의 상황을 프리젠테이션해 놓은 그림과 함께 위의 기사를 볼 수 있다. http://www.nytimes.com/2010/04/27/world/27powerpoint.html?scp=1&sq=powerpoint&st=cse 그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 얼마나 복잡했던지 그릇에 담겨져 있는 스파게티 보다도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전한다(looked more like a bowl of spaghetti). 그리고는 그러한 프리젠테이션들이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단순화된 ..

The Lord often leaves his servents..

But the Lord often leaves his servants, not only to be annoyed by the violence of the wicked, but to be lacerated and destroyed; allows the good to languish in obscurity and squalid poverty, while the ungodly shine forth, as it were, among the stars; and even by withdrawing the light of his countenance does not leave them lasting joy.... (Calvin, Inst. II. x. 16) 신자들은 가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짧은글 긴여운 2010.05.20

우리 삶의 좌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가장 인간의 근본적 물음에 대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묻고 또 물으며 그 대답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비록 다양한 시도들과 인간의 노력이 있어왔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발전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근대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우리들에게 심어주었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환상을 산산이 깨뜨리며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동시대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혼란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시작되었던 복음이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천 오백년이란 ..

인생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설교자들에게 있는 한 가지 욕심 또는 유혹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설교 한 편으로 사람을 변화시켰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한 편의 설교는 아니고 몇 번의 설로라도 사람의 마음을 감흥으로 뒤집어 놓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고 과욕이며, 교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은 설교 한편의 내용, 감동적인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설교 한편으로, 감동적인 예화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설령, 감동을 받아 내일부터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게 잘 살아야겠다 하고 공개적으로 서약을 한 경우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