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가장 인간의 근본적 물음에 대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묻고 또 물으며 그 대답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비록 다양한 시도들과 인간의 노력이 있어왔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발전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근대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우리들에게 심어주었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환상을 산산이 깨뜨리며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동시대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혼란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시작되었던 복음이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천 오백년이란 시간을 지나면서 역사, 문화, 정치, 상업, 예술 그리고 삶 전체 속에서 거기에 머무르면서 그 흔적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때로는 부흥기 속에서 때로는 쇠퇴기 속에서도 여전히 유럽인들의 피부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간 복음은 폭발적인 부흥을 거치면서 현지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유럽 대륙에 머무르며 꽃을 피웠던 진리의 보화들은 근대적 사고 아래서 자라난 기독교인들에게는 진부한 것으로 보였고, 좀 더 신선하고 적응력 있고, 필요한 내용들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은 이미 복음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졌고 늙은 소처럼 아무런 쓸모없이 외양간에 메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시아 대륙은 새로운 대륙으로부터 새롭게 다듬어진 신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미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어떤 진리의 보화들이 있었는지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인들은 일하지 못하는 늙은 소와 한 번도 코를 뚫어 본 경험이 없는 망아지 같은 젊은 소처럼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할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가꿔가야 할지 지도받지도 못한 채 급히 쇠락해 가고 있는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삶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큰 도약이 있었고 같은 복의 내용이 주어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는 창조부터 있었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주시는 교훈도 질적으로 큰 발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처음은 단순하며 상징적이었지만, 후에는 좀 더 다양하고 실제적이었을지라도 그것을 발전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현 시대 속에서 우리 삶의 좌표를 살피되 최고의 상급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