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들에게 있는 한 가지 욕심 또는 유혹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설교 한 편으로 사람을 변화시켰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한 편의 설교는 아니고 몇 번의 설로라도 사람의 마음을 감흥으로 뒤집어 놓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고 과욕이며, 교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은 설교 한편의 내용, 감동적인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설교 한편으로, 감동적인 예화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설령, 감동을 받아 내일부터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게 잘 살아야겠다 하고 공개적으로 서약을 한 경우라도 그것이 실제 자기 내면의 모습까지 그렇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의 성향과 습관입니다. 오죽하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긋 지긋하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로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하지만 또 40년을 광야에서 속된 말로 뺑뺑이를 돕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1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가나안에 40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잘 살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훈련받은 지가 수 십 년이 흘러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많이 섬기느냐 하는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되게 섬기느냐 하는 질(質)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한다고 하지만 부모의 눈에는 아직 성이 차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양의 문제라기보다는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역시 ‘얼마나’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평생 싸워가야 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고 진단을 내릴 수 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정확하고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임무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실패의 쓴 맛을 보지 않도록 미리 미리 경고하고 야단을 쳐서라도 불행한 결말을 피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