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여운/수상록 124

병중에 계신 J 목사님께

몇 해 전 두 해 동안 마음에 겪으신 고통은 가족들조차도 본인만큼 느낄 수 없는 극심한 병이라고 저는 알고있습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느껴야 했을 절망감과 좌절은 고통 자체보다도 훨씬 더 크고 괴로우셨 겁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것처럼 기적같이 회복된 후 2년간 충만한 복을 누리시는 것을 옆에서 볼 수 있어서 저도 감사했습니다. 이번에 닥친 육신의 고통은 몸에 칼을 대고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하는 두려움은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전에는 영혼의 고통이 육체마저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육의 질고가 믿음으로 단련된 영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더 한 고통을 한 번 경험 하셨이니 두 번째는 더 담대해질 수 있고 전에는 준비없이 마주해서 당황하셨지만 이제는..

신학으로 신학의 부재를 초래하다

교부시대에 한 인물의 신학 속에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었던 까닭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정초를 놓아가던 시기에 발생할 수 있는 한계였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오류를 걸러내고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전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치밀한 싸움이 각각의 테제들을 놓고 이루어졌고 그 결과 마지막 시기에 표준문서로서 신앙고백와 요리문답,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에서 비롯된 교회정치의 원리와 모범까지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후 기독교 교리는 전 체계가 거의 갖추어졌으므로 더 이상 한 개인 안에서 기독교 교리의 전체계와 다른 부분을 주장한다는 것은 교부시대의 한계처럼 변명할 수 없고, 오히려 그가 이해하고 있는 전체계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현대에 발생하는 새로운 교리 논쟁들은 근..

사건과 사실들 너머에 있는 진실

요즘 사회상과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발전'에 대한 본질을 고민해 봅니다. 한 사회든, 교회든 과연 발전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발전적 사고는 가깝게는 18세기 진화론적 사고 방식에 기인하는 것인데, 이전보다는 다음이 더 발전되고 더 낫다는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핵심인데. 기술이나 기계문명과 같은 것들에는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문화라든지, 사회사상이나 보편적 가치와 기준들, 인간 삶의 본질. 신앙의 본질 등 이런 것들에 과연 발전 개념이 타당한 것인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나 가는 것이고 때로는 굽어지고 되돌아오고 어떤 마지막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물론 신앙인에게는 그 마지막이란 재림 때의 종말이겠..

복된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이 세계는 한 인생이 자기 사는 날 동안 담아낼 수 있는 크기보다도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 인생의 시간 속에서 경험하고 만나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지혜가 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도록 성대하게 차려진 식탁이라는 겁니다. 평생 맛을 보고 먹고 마셔도 아직 다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차려진 식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음식들 가운데에는 쓴 맛을 내는 약초도 있을 것이고 달콤한 반찬도 있을 것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좋은 양식이 됩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양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란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치 않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