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율법
- 장로주의
- Bavinck
- Thomas Brooks
- 칼빈
- 토마스부룩스
- 솔로몬성전
- 회의법
- 치리회
- 교회회의법
- 교회회의규칙
- John Calvin
- 회의규칙
- 욥기
- 기독교강요
- 위로
- 근대정신
- 교리논쟁
- 교부신학
- 조선예수교장로회
- 장로회각치리회보통회의규칙
- 바빙크
- JosephCaryl
- 각치리회보통회의규칙
- 본성의일
- 갈라디아서
- 장로교회법
- 은혜의일
- 문자주의
- non-conformist
- Today
- Total
목록전체 글 (244)
칼빈장로교회
천상에서 성도의 기도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로 대체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시의 말씀은 오직 66권 신구약 성경에만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진 보다 엄밀하고 건전한 초대교부들과 동일한 신앙정신을 따라 일어난 종교개혁의 열매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따라 세워진 장로교적 개혁신학자(칼빈주의자)들과 그런 신학과 신앙정신으로 검증되고 확립된 교회의 신앙고백들(벨직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신조(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7)도 같은 뜻으로 존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 신앙정신으로 고백합니다. ■ 예배 및 모임 안내 ..
문 : 어떤 설교자의 설교 내용이 성경 해석상으로 문제는 없으나 설교자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의 성경해석의 일부분을 설교에 인용할 수 있습니까? 답 : 세 가지 점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1. 첫째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작업과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의 차이 학문적인 작업과 설교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학문적인 작업도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글의 특성상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분석 비판하는 가운데 옳바른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다양한 이론과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해석과 그에 따른 일관된 적용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설교자는 교회의 왕되신 주님의 통치권을 대리 수행하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과정과 결과, 내..
교부시대에 한 인물의 신학 속에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었던 까닭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정초를 놓아가던 시기에 발생할 수 있는 한계였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오류를 걸러내고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전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치밀한 싸움이 각각의 테제들을 놓고 이루어졌고 그 결과 마지막 시기에 표준문서로서 신앙고백와 요리문답,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에서 비롯된 교회정치의 원리와 모범까지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후 기독교 교리는 전 체계가 거의 갖추어졌으므로 더 이상 한 개인 안에서 기독교 교리의 전체계와 다른 부분을 주장한다는 것은 교부시대의 한계처럼 변명할 수 없고, 오히려 그가 이해하고 있는 전체계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현대에 발생하는 새로운 교리 논쟁들은 근..
사탄은 결코 신자의 면류관을 빼앗을 수 없지만, 그의 악의와 시기가 심하여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위로와 평안을 빼앗아 그들의 삶을 짐과 지옥으로 만들고, 슬픔과 애통함, 한숨과 불평, 의심과 의문으로 하루를 보내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고, 우리의 은혜는 참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소망은 위선자들의 소망이고, 우리의 확신은 우리의 억측이며, 우리의 즐거움은 우리의 망상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복된 존 브래드포드(순교자)는 그의 서신 중 하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 때때로 제 마음과 악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저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눈이 멀고, 그들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굳..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본성의 일(act)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기꺼이 사는 것이면 그것은 은혜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 거룩함이란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는 동안에도 만족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거룩함이다. 다른 한편, 죽는 것도 본성의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죽는 것도 은혜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순종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의 의도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기뻐하심으로 순응하여 죽으셨다. 이와 같이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그의 모든 순종의 면류관이다. 사단은 우리를 우리 뜻대로 살도록 하며, 우리가 원할 때 죽게 한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살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할 때 죽는..
요즘 사회상과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발전'에 대한 본질을 고민해 봅니다. 한 사회든, 교회든 과연 발전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발전적 사고는 가깝게는 18세기 진화론적 사고 방식에 기인하는 것인데, 이전보다는 다음이 더 발전되고 더 낫다는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핵심인데. 기술이나 기계문명과 같은 것들에는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문화라든지, 사회사상이나 보편적 가치와 기준들, 인간 삶의 본질. 신앙의 본질 등 이런 것들에 과연 발전 개념이 타당한 것인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나 가는 것이고 때로는 굽어지고 되돌아오고 어떤 마지막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물론 신앙인에게는 그 마지막이란 재림 때의 종말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