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otional Exercises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학적 토론뿐 아니라 경건 훈련과 기도회도 함께 진행하였다. 총회는 의회와 더불어 정기적이며 특별한 금식일(fasts)을 정해 지켰는데, 이것은 당대 청교도 경건의 특징적인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1643년 9월 25일 월요일, 의회와 총회가 함께 세인트 마가렛 교회(St. Margaret’s Church)에 모여 ‘엄숙한 동맹과 서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순서로 예식이 진행되었다:
• 먼저 화이트 목사(Mr. White)가 약 1시간 기도했고,
• 이어 나이 목사(Mr. Nye)가 1시간에 달하는 권면을 전했으며,
• 그 다음에는 헨더슨 목사(Mr. Henderson)도 같은 길이의 권면을 하였다.
• 이어 서약이 낭독되었고,
• 영 목사(Dr. Yonge)가 기도하였으며,
• 윌슨 목사(Mr. Wilson)가 시편을 인도하고,
• 마지막으로 마무리 기도가 이어졌다.
• 그리고 총회는 ‘금식일을 지키기 위해’ 목요일까지 휴회하였다.
1644년 5월 17일, 에식스 장군(General Essex)의 요청으로 진행된 금식일에 대해, 베일리는 “영국에서 보낸 날 중 가장 은혜로운 날”이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트위스 박사가 짧게 기도를 드린 후, 마샬 목사(Mr. Marshall)가 2시간 동안 장엄한 기도를 드렸는데, 총회 의원들의 죄를 매우 감동적으로, 또 신중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 애로스미스(Arrowsmith) 박사가 1시간 설교하였고, 시편이 불려졌습니다.
이어 바인스(Vines) 목사가 약 2시간 기도하였고, 팔머(Palmer) 박사가 1시간 설교하였으며, 시먼(Seaman) 박사도 2시간에 가까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헨더슨 박사는 총회의 자복(confession)과 눈에 보이는 잘못들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토론을 이끌었고, 특히 재세례파(Anabaptists)와 반율법주의자(Antinomians)에 대해 설교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트위스 박사가 짧은 기도와 축도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함께하셨기에, 우리는 총회와 온 나라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을 읽으며, 당대 청교도 신학자들의 경건의 깊이와 인내력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설교의 길이, 세상과의 단절, 복장과 태도의 엄격함, 독특한 언어 표현, 심지어 무고한 예술과 오락에 대한 반감까지 생각하면, 왜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시대에 전혀 반대의 경향이 생겨났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교회 음악, 건축, 장식, 복장, 그리고 세련됨—그 모든 아름다움은 철저히 배척되었다. 시(詩)조차도 환영받지 못했고, 밀턴조차도 그의 생애 동안에는 어두운 곳에서 노래해야 했다. 문체도 고답적이고, 투박하고,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시대의 인쇄술조차도 음침하고 아름다움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시대에는 미학(aesthetics)보다 본질과 진리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격변기의 급진적 경향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사실 초기 기독교도, 로마의 미(美)와 예술을 거부하고 카타콤(catatombs)의 어둠 속에서 예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교회의 성자 터툴리안(Tertullian)는, 어떤 면에서 청교도보다도 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