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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시대

소박한 나그네 2011. 1. 4. 15:13

하이델베르그 제 1 문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면서 창세기 5장에 등장한 "노아"라는 인물(comforter)과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위로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중략)......


위로가 필요한 시대상이란?

위로가 필요할만큼 어려운 시대란 어떤 것일까?

물론 살기 어려운 시대라 했을 때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사회가 건전하지 못할 때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고생스럽다. 일한 만큼 소득을 얻지도 못하고, 불의한 자가 성공하고, 평범하게 사는 일조차도 쉽지 않은 그런 시대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서민들의 위로는 무엇일까? 밥 세끼 걱정없이 먹고, 자녀들 건강하게 교육시키고 이런 정도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런 시대 사람들은 로또와 같은 대박을 꿈꾸기도 하고, 편법이나 권력을 사용해서 많은 것들을 누리는 힘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그런 기회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고 자기 삶에서 작고 사소한 부정에 대해서는 적당히 눈감아 주고... 그런 삶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걱정없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꿀 수 있지만 그런 사회란 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이 세상엔 그런 부조화와 불평등, 불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언제부터인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때부터 그렇다. 그러나 노아가 태어났던 그 시대는 창세기 4장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듯 말하고 있지만 그 시대는 상당히 발달한 사회임을 말해 준다. 살기에 팍팍하고 고달픈 그런 어려운 시대라기 보다는 문화나 문명이 상당히 발달한 사회, 오늘날의 이런 기술들과는 좀 차이가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소위 대단한 기계문명이나 문화 예술 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를 예를 드시며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잘 보여준다. “홍수 전에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마 24:38, 눅 17:27). 이 말씀은 도저히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평상적인 일들에 취하고 마음껏 즐기고 누리던 시대적 특징을 말해준다. 안그랬으면 노아가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짓고 그런 소동을 벌일 때 누군가는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동조한 인물을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 가족들 외에는. 그리고 동물들 외에는.



노아를 통해서 보여주는 위로의 본질


노아는 바로 그런 시대에 세상에 위로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보내진 자다. 노아는 바로 그런 일상에 심취해서 살아가는 그런 시대 풍조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비록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며 살지라도 바로 그러한 삶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며 참된 위로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환경이 달라지고 나아지고 더 윤택해지는 것으로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위로는 못된다.. 하는 그런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서 이 대홍수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고 마음껏 누리며 자기 뜻대로 살아가던, 즉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모조리 세상에서 다 사라지게 하고, 위로자였고 당대에 의인이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그후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그들의 후손들 조차도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던 그런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세상에 사는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되고 유일한 위로란 환경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괜찮고 정직하고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도 안 된다 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홍수 후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런 사람으로도 이길 수 없는 그런 고달픈, 위로가 없는 인간의 그런 삶은 극복되지 않는다 하는 말이다.

(하략)........



**심방하는 시간을 빌어 성도들의 삶, 한 가운데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들은 치열했습니다.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에도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이 필요한 위로와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 사이에는 작고도 깊은 간격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위로와 영원한 위로 사이에도 작은 틈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전자를 어떤 이는 후자를 강조하고 또 다른 이는 균형을 강조합니다. 둘 사이에 힘겨운 줄타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 양면은 진리 안에서 하나(only and truly)의 위로가 있을 뿐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 양손에 각각  두개의 위로를 주려고 한다면 갈등은  더심화될수 있습니다. 오히려 참되고 영원한 위로를 통해서 어째서 그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이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인지를 알도록 해야합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진정하고도 참되고 유일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낡아지지 않는 그런 위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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