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율동 및 드라마 사용 문제에 관하여
(Dance and Drama in Worship and Evangelism-A Contemporary Problem)
Rev. John Marshall/서창원역
(진리의 깃발, 1995.6. 제13호)
1. 들어가는 말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많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한편으로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요소들도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계신 모든 증거를 인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능력과 은혜로서 영광 가운데 확증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들 주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충분히 증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도 더 우리의 예배와 삶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설교를 잘 듣고 회심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혀 감동을 받지 않으며 우리의 메시지에 의하여 움직이지도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우리의 복음에 관한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그들이 과연 알고 있는가?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 글의 제목에서 문제 삼고 있는 논제들을 말함에 있어서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점과 실수투성이의 사람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달라는 열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진리의 영광스러움과 능력은 영적인 오류들과 영적 혼동을 바로 잡아 주는 큰 잣대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고 또 우리가 올바른 예배와 전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 교회들이 예배와 전도의 혁신을 추구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우리가 다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춤과 드라마 사용
일부 독자들은 왜 우리가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춤과 연극 사용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사실 일부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별히 대학 캠퍼스 활동을 하는 자들이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단체나 교회 활동에서 폭넓게 애용되고 있다. 거리 공간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것은 전도에 큰 효과를 가져 온다고 믿기 때문에 드라마 사용이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 문화 창달이라는 명목 하에 마치 드라마나 춤을 가진고 복음의 진리를 표출하는 것만이 참다운 기독교 문화인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예술인들과 연예인들의 활동을 인원 동원 및 교세 확장 차원에서 크게 권장해 온 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온 것이다-역자주) 자유주의 교회들은 오랫동안 기독교 연극이나 예술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문제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은 복음주의 또는 보수주의 교회들조차도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현대적인 율동이나 드라마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일을 권장한 학자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국 성공회 신학교 교수로서 그는 「춤추며 여호와를 찬양하라」(Praise Him in the Dance)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 책의 서문에서 '위대한 연인은 위대한 댄서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예배와 전도에 있어서 율동 사용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참된 예배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개신교 외에 다른 종파에서는 드라마 사용이 이미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R.C.D.Jasper는 '1948년에 Ronald Knox가 「The Mass in Slow Motion」이라는 책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미사에 일종의 댄스가 사용되는 것은 관객인 회중들에게 하나의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표출하는 것이다'라고 오래 전에 말했음을 기록하였다. 그는 예배가 말씀뿐만이 아니라 몸동작 언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 교회는 그리스교회의 영적 생활과 흡사하다. 이 교회의 예전은 심지어 교회 내부 장식까지도 그리스 드라마와의 연계성을 무심코 들어내고 있다. 실로아주 경건한 러시아 정교회 작가 중 한 사람은 그들의 예전을 주저없이 "구원의 드라마"로 말하고 있다‥‥‥이것이 동방 교회의 경건이다. 동방 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무대"(theatron pneumatikon)이다.' 천주교에서 용납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제 개신교, 특히 일부 보수주의 교회서조차도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에 있어서 예배와 전도 집회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선포였다. 이것은 개신교의 영광이요 힘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현상적인 흐름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믿는다. 하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전통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예배의 중심을 언제나 하나님말씀 선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율동 사용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본 이슈들을 수용하고 있는 자들은 이성주의자들이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합리화시켰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들 앞에서 어떤 경외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들은 어떤 것으로도 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비밀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형태 안에서, 화상이나 조각물에 나타난 것들을 안에서, 사제들의 화려한 성의 착용에서, 찬양대와 사제들의 아름다운 찬양에서, 제단에서 휘날리는 향연에서, 사제가 붙들고 있는 십자가 안에서 오직 오감을 통하여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에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J.G.Davis가 쓴 「예배와 율동」(Worship and Dance)이란 책의 서론에 실린 내용이다. 그는 이 서론에서 그의 책 마지막 부분을 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쉬바(Shiva)신을 나타라야(Nataraja), 즉 춤의 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글을 기록하였다. 이 서론에서 우리는 시드니 카터로부터 시작하여 춤의 신인 쉬바신에게까지 우주에 있는 모든 동작의 출처로서 그의 리드믹한 춤의 전 영역을 다 다루었다.' 이같은 기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3. 율동과 드라마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같은 급진적인 흐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어떤 것도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특징짓는 춤이나 뮤지컬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얼다. '어쩌면 구약 성경에서 그같은 사실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례가 있다면 거기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부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주요한 증거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역사이다. '신약 시대 이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 춤이나 드라마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 일부 교회가 이같은 행위를 사용했는데 이것조차도 어거스틴은 이교도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글을 기록하였다‥‥중세기에 오면 중세 교회는 기적과 신비성을 추구하는 열정이 아주 컸는데 이때 연극 사용이 대단히 대중화를 이루었다. ' 우리는 이 주장을 심도 있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중세 교회가 음악이나 드라마 사용 문제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활동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다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오히려 그같은 무대 활용에 대한 반대가 아주 컸다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제2세기에 타티안은 '배우를 가르쳐서 내적으로는 자신을 보이지만 외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꾸미는 자'로 말하였다. 한편으로 터툴리안은 그가 쓴 De Spectaculis에서 '진리의 저자께서는 모든 거짓을 싫어하신다. 성령은 사실이 아닌 모든 것을 불의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위선을 성령께서는 정죄하시며 어떤 가식적인 음성이나 성(性)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옳은 것으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또 꾸며낸 사랑이나 진노, 슬픔과 눈물을 옳게 여기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로부터 시작하여 내려온 금지 사항중 하나는 교인들이 무대와 관련된 그 어떤 것과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연극 공연이 대중적인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많은 익살과 외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연극이나 유회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성결케 하고 의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보는 이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용도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하여 가장 심도 있게 다룬 분은 Historiomastix(1632)를 쓰신 William Prynne이다. 이 책은 분략이 천 여쪽이나 되는데 악마가 모든 연극 무대의 저자라는 전제로 시작하고 있다. 프린씨는 분명 가혹할 정도로 극단적인 논쟁자로서 우리는 그의 비판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의 기념비적인 특성은 그의 주장을 논박하는 반대자들조차도 인정하였다. 프린의 칼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라우드 대주교(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을 핍박한 성공회 대주교 임-역자 주)는 '그 책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도 60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Prynne은 무대공연을 반박하는 엄청난 분량의 글을 출판하였다. '성 키프리안이 성경은 모든 종류의 호화로운 구경거리와 무대 공연을 영원히 정죄한다고 결말지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이 우상을 섬기는 행위들이 공연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공연들은 모두 다 공허한 것들이요 추잡한 것을 들어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터툴리안이나 락탄티우스, 예루살렘의 씨릴 및 크리쏘스톰 등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는 시편 119:37의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말씀을 무대 공연을 반대하는 근거로 주장한 힐러리나 암브로스를 언급하였다. 그의 글을 통하여 두 군데만 더 인용해 보자. 먼저 '터틀리안은 그의 책 De Spectaculis에서 이교도들이 예수 믿는 신앙인이 되면 그들이 즐겨했던 모든 연극 공연을 내 던졌다'고 주장하였다. 또 하나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무대 공연과 유회, 율동들 및 스포츠 활동과 호화스러운 구경거리들을 악마의 작품이요 악마의 허식으로 간주하고 다 포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흐름에 대하여 교회사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초기 교회들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그 부분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롱 여사의 주장, 즉 '신약 시대 이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율동이나 드라마 사용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 말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이와 같은 활동들에 대하여 뿌리깊은 적대감을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주장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기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사이에는 약간의 다른 견해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존 베일은 연극에 대하여 강한 칼빈주의적인 입장에서 홍보하는 글을 썼다(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Article on Drama 참고). 더욱이 「튜더 프리탄니즘」을 쓴 나펜(Knappen)교수에 따르면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적 드라마 연출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칼빈이 어디에서 했는지를 나펜교수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청교도들이 모이는 처소에서 종종 연극이나 가면극을 공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저자는 '베자 역시 개신교도를 위하여 미스테리한 연극 대본을 썼다'고 주장하였다(「옥스퍼드 교회사 사전」에서 드라마 부분을 참고). 심지어 Prynne도 '옛 종교개혁 시대의 연극이나 추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시인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시대에 무대 공연은 개신교 사상을 대중들에게 더 빨리 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Histriomastix).'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주로 반대 입장을 다룬 것이다. 1581년에Stubbs는 그의 책 The Anatomy of Abuses의 서문에서 '몇몇의 연극과 비극 및 토막극들은 아주 진실하고 추천할 만한 놀이'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도 수정 증보판에서는 빼 버렸다(Tudor Puritanism, M.Knappen). 1599년에는 레이놀즈의 「Overthrow of Stage Plays가 출판되는데 이 책에 레이놀즈는 '외설적인 것이나 상스러운 말, 경솔한 행동, 술 취함 또는 어떤 잘못된 행동들을 본받거나 모방한다는 것은 분명히 합당치 못한 행동들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 주제에 대한 조오지 휫필드 목사의 견해가 어떠했는지를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휫필드 목사는 말하기를 '내가 학창시절에 희곡들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하여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그 대본에 나오는 역할들을 연습하곤 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내 자신이나 친구들이 얼마나 열심인지를 보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어떤 역할까지도 맡아 주셨다. 그리고 나보고 여학생 복장을 입도록 하셨으며 함께 공연하기 전에 내 역할을 열심히 연습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종종 나를 당황케 하였지만 나는 그 같은 일을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고 싶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종합해 보자. 일반적으로 드라마 사용에 대한 반대 의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교회 밖에서도 용납되지 않은 것을 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은 드라마틱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천주교나 전통적인 교회 예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대체로 예배가 영적이요 성령의 역사 가운데 신약 성경에 어떤 형태의 춤이나 드라마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 개혁 교회들에서는 드라마 사용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가 있음을 보아 왔다. 더 나아가 일부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가운데는 비록 그들이 가진 태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드라마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근거는 성경이다. 이제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것들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는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그이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행 6:15). 영적 기쁨은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부흥과 연계되어 나타난 열정적인 찬양은 이 같은 진리의 또 다른 현상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3:8). 우리는 술주정뱅이요, 깡통제조업자인 빌리 브레이(Bray)가 하나님 앞에서 그 많은 청중들을 하나의 거대한 형상으로 녹아내린 듯한 겸허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 설교사역을 읽을 수 있다. 모인 회중들은 큰 죄책감에 사로 잡혔고, 고통 하는 영혼들이 무아지경으로 빠지는 듯한 모습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마치 "성령의 술에 취한 자들"로 불려졌다. 어부들의 대다수는 황홀한 "춤"을 추었는데 이 같은 모든 현상들은 비록 육체적이고 신비학적인 흥분이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 생애를 통하여 영적 변화로 이어졌다(영국판 진리의 깃발, 1978년 3월호,Reminiscences of the 1859 Revival). 그러나 부흥과 관련하여 나타난 이러한 현상들은 앞에서 언급된 율동이나 드라마 사용 문제와는 거의 관련지을 수 없는 것들이다.
4. 춤을 추며 예배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증거
현 시점에서 우리가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간단한 본 논고에서 성경적 증거를 세밀하게 취급한다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요, 또 하나는 우리의 주된 관심이 예배요 전도 집회에 있어서 춤과 드라마 사용에 관한 관심을 다룬다는 사실을 독자 제위께서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사회 전반적으로 이 부분은 크게 이용되고 있지만 예배와 전도 집회에서 이 행위들의 사용 문제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율동이나 드라마 사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현상이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 시대에는 예배에 있어서 외적이고 가시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손으로 지은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졌으며, 많은 회생 제물들이 있고, 화려한 성의를 착용하는 제사장들이 있었다. 구약의 제사 의식은 전부가 다 외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식은 가시적인 효과가 매우 컸으며,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들이었다. 성전 자체도 황금과 은 및 백향목으로 꾸며진 화려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나은 영적 예배를 위한 하나의 준비 단계일 뿐이다. 이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도 명백히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1-2). 또한 이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확하게 나타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바울도 이 원리를 재차 말하고 있다: '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자, 및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가 할례당이라'(빌3:3). 구약 성경에서 제사의 합법적인 한 부분으로 하나의 특수한 행위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신약 성경의 원리에서도 그대로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149:3, 150:4, 출15:20,삼하6:16등의 말씀들은 육체적 행동으로 반영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결함 중 한 가지는 춤을 추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팔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32:19). 이 말씀을 보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경이 진술되고 있는데 춤을 추며 예배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전적으로 타락한 춤 광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배'는 아주 대중적이요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받아 드렸다. 그러나 육적인 대다수의 군중을 대항하여 거의 홀로 서 있었던 모세에 의하여 그같은 예배는 격렬히 제지되 었다.
신약 성경 자체에서 춤을 추며 예배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유일한 춤추는 모습은 눅7:32로서 살로메의 춤추는 장면이다. 이 결과로 세례요한의 목이 잘려 나갔을 뿐이다. 세상에 취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춤추는 일이 대부분 타락한 현상과 연계되어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타락과 죄악된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경우와 세상적인 그러한 특성과 더불어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춤을 추는 행위를 도입하는 것은 대부분이 악마적인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엄중히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춤을 추며 예배하는 행위를 옹호하려는 자들은 몸을 사용하는 문제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즉 ·하나님은 나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체로(이 육체는 나 자신의 존재를 땅에서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임),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바르게, 경외감을 가지고 즐거이 사용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Praise Him in the Dance, Anne Long).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분명히 표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우리의 몸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온전한 육체를 지니셨는데 몸 자체에 본능적으로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수행하는 도구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환자를 방문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며, 기독교의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일들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즉, 춤과 드라마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다 더 명확하게 제공해 주는 창문과 같다'(Ibid) , '노래하는 것은 음악으로 말씀으로 그리고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반응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른바 바디 언어(Body languag)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 신약에서는 영적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하여 볼 때 앞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그와 같은 행위가 도입될 수 있다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쉽게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 사랑과 혼돈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춤을 추며 예배하는 행위를 추천한 자들조차도 춤 자체에 위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춤과 드라마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육체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잘못 권장되는 것일까?' '어쩌면 예배당 안에서 춤을 추는 일이나 드라마를 구경함으로 인하여 일부 성도들은 잘못된 감각적인 느낌이 발동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Ibid). Worship and Dance 라는 책에서도 같은 위험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그와 같은 분명하고도 심각한 위험 요소를 해결하는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위험 요소는 너무나도 선정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감각적이고 성적인 감흥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보다 더 명확한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비잔틴 제국의유명한 설교자인 크리쏘스톰은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춤추는 곳이 있는 곳에 악마도 있다. 하나님께서 춤을 추라고 우리에게 발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춤을 추면 우리 자신의 품위를 상스러운 몰골로 전락시켜 버릴 것이다. 우리는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한다. 낙타처럼 팔짝팔짝 뛰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높임을 받아야 한다. 만일 우리의 몸이 타락의 나래로 빠져 들어가면 우리의 영혼은 더할 것이다--- 춤을 추는 것은 악마의 발명품이다' (Discussions - Evangelical and Theological, R. L. Dabney). 주후 692년 Trullo에서 열린 8차 종교회의록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춤을 추는 모든 여성들의 춤을 금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많은 상처를 주며 사람을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공 예배 시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성경으로부터 정당화시키려는 노력들은 처절할 정도로 약하다. 그와 같은 행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위험 요소들은 우리 시대정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필요한 것은 몸짓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정결케 하심과 영광스러운 임재의 역사이다. 여성들의 춤동작을 바라봄으로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낯선 요소들을 단순히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예배에 도입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써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예배 속에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5. 드라마 사용에 대한 성격적 증거
공 예배 시에 드라마 사용이 합당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근거 역시구약 성경에서 찾아질 것이다. 특별히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행동한 상징적인 행위들을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3, 8:1-4, 예레미야 13:1-11, 16:1-4, 19:1-2a,10-11a,32:7-15,에스겔 4:1-4등이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물론 다른 많은 사례들이 더 있다. 때때로 선지자들은 상징적인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행동들을 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선지자들이 독특한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다른 사람의 역을 대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동이요 그들의 행동이 담고 있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예리하게 그리고 밝게 전달하는 행동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현대적인 모습을 중국인 설교자인 요한 성 목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죄를 지적하며 설교했을 때 '죄를 가지치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주 즉흥적으로 설교 강단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화초들을 뿌리째 뽑아 들었던 것이다. 분명히 이와 비슷한 행동은 모든 설교자들이 하도륵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은 꾸며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성 목사의 경우 분명 그는 성실한 행동을 한 것이 명백한 것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가 연극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가 선포하고 있는 진리를 특별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들도 대부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하여 같은 행동을 한 것이지 연극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신약 성경에서도 연극을 행한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정말 근거가 없다. '연출배우'에 해당되는 헬라 말에서부터 영어의 '위선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안에 탁월한 배우들과 뛰어난 연극 행위들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기만시키는 일에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경건의 모습을 연출한 배우들이었다. 유다는 사단의 종노릇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완벽한 행동을 연출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배우들이었다. 오직 베드로의 초자연적인 영적 통찰력에 의하여 그들의 위장을 들추어냈을 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연극 배우로 만들고 싶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실은 이것인데 다른 무엇으로 가장하고 있는 위선적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싸움을 해야 할 우리들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추구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연극하도록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하고는 정반대의 길을 가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위장한 적이 결코 없었다.
이 문제는 사람들이 악마적인 행동을 연출해 내도록 요구될 때 더 가속화되어 진다. 연극의 주인공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찬양을 할 때나 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릴 때나 또는 춤을 추면서 찬양을 하며 연극을 하게 되든지 우리는 여전히 "성령의 전"인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가룟 유다나 창기 및 사단의 역을 연출할 때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다(적어도 신학적으로-역자 주, Praise Him in the Dance, Anne Long). 어떻게 경건한 성도가 불의한 자 또는 심지어 사단의 역할까지 연출할 수 있는가? 어찌 성도가 그 같은 역을 감당할 수 있으며 유다와 같은 사단의 특성을 습득하여 연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성도가 성도 아닌 행동을 연출하기 위하여 그 같은 역을 땀을 흘리며 소화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이나 또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성부 하나님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요청될 때 더 심각하게 대두된다. 드라마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그 근거를 구약 성경에 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주지하지 못할 수 있는가? 그의 압도적이고 장엄한 영광스러움, 그의 거룩하심, 흠이 없는 깨끗함, 그의 전능한 공의로우심을 타락한 죄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가? 호세아가 깨끗지 못한 아내를 취하는 문제를 드라마로 꾸밀 수 있을지 모른다. 호세아의 경험은 이스라엘의 불충성스러움을 가장 뼈아픈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욥이나 다윗의 고난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는 그림자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경험이 꾸며진 것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에 연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호세아는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의 삶이 하나님에 관한 특정한 진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하나님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아벨의 피흘림으로부터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마 23:35)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려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난은 주님을 향한 헌신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는 타락한 죄인이요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우상 숭배 죄와 신성모독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역을 연출하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타락한 심성과 연약성 및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죄성의 몸짓으로 표현한다는 것에 그리고 악역을 수행한다는 것에 어찌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구세주께서 지금 영광스러운 자리에 계시고 천사들과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성령의 강하신 역사하심으로 영광스러운 임재하심이 온 회중가운데 있으심을 알면서 영광의 주님을 가장하고 있는 죄인의 연기를 감상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천사들이 주님을 예배한다. 주님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역을 연기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임재 하시는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 그들은 성전에서 연기를 했는가? 사도 바울조차도 고린도에 드라마를 전문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의 주님께서 계시하여 준 말씀을 따라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였고 예루살렘을 그들의 가르침으로 가득 채워 나갔다. 사람들이 예배와 전도 집회에 이러한 춤이나 드라마를 도입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온전히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본 논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일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죄인들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주고 거룩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영혼 속에 강력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는 그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6. 맺는 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를 살펴보는 것보다 남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춤이나 드라마 사용이 교회 생활에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임하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실 때, 우리 교회가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를 나타낼 때 사람들이 그 같은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아내가 곁에 있는데도 아내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고 아내의 특성을 잘 묘사하지 못하는 사진을 가지고 좋아한다면 옆에 있는 아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우리와 같은 죄인 동료가 그리스도를 연기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감각적이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무대 배우같은 것을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교회의 임무는 지옥에 갈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거나 감각적인 흥미진진한 것을 주기 위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통하여 그 죄인들을 구원하는데 있다. 가룟 유다나 천국에 들어가는 강도의 역이나 어떤 대역을 하기를·원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가장하는 일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더 온전하게 가꾸어 가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권면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단과 죄의 가장 강력한 원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고 보존되지 않으면 죄인들은 언제나 말씀의 강력한 증거를 피하기를 추구한다. 광야에서 방황했던 이스라엘의 자녀들처럼 그들의 필요를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애굽의 맛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애굽의 것을 갈망하면 발은 가나안으로 향하여 가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해야 할 곳에 거하지 못하도록 말씀을 제거하는 작업을 늘 궁리하고 실천한다.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는 도구를 언제나 강력히 막아서는 것이 사단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땅에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하심이 늘 우리 곁에 있도록 기도하자. 이러한 문제들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에 빠지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본 논고를 통하여 무척 당혹해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그들이 주께서 도우셔서 보다 더 명확한 조명 하에 본 논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