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여운/수상록

사소한 일에 목숨걸기

소박한 나그네 2013. 5. 30. 17:25

모든 가치들을 경제유발 효과로 환산하는 데 재미를 붙인 현대사회의 의식구조 속에서 '선'이나 '정의', '진실'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혹은 우리의 '신앙'을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를 매길 수 있을까?

이런 형식들은 이해를 빠르게 할 지는 몰라도 그 본질을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왜냐하면 그것을 값으로 환산하는 순간.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일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단답형의 대답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물음이다. 그렇다고 좋은 안내자가 없는 깊은 사색은 전혀 다른 출구를 열어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란 그 시대 속에 살아 숨쉬는 표징이다


  호라티우스의 'Carpe diem' 이라는 표현만을 차용하여 우리 신앙의 한 단면을 사색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기실 이 명령은 상식인들에게 대단히 어렵고 난처한 것이다. 의식주는 인간 삶의 틀이고 형식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생활의 전부일 수 있다. 주님은 그것을 먼저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하셨다. 심지어 그것을 먼저 구하는 자는 '이방인'이라고 하셨다.


   버리면 생기고, 포기하면 얻는다는 이 역설의 메시지를 우리는 어떻게 혼란스럽지도 않고,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삶에서 우리 신앙이 아무 쓸모없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오래된 신문지처럼 여겨지지 않고 생생하게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지, 신앙이 어떻게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진두지휘하게 해야 하는지를 사려깊게 생각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삶의 근본적 틀과 그 방향들에 대해서 꿰뚫고 계시는 분이다. 인간의 불안과 염려는 무지로부터 온다. 무엇으로부터의 무지인가? 미래에 대한 무지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으시다. 그분께는 언제나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런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단지 교회 안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시대의 존재, 모든 역사를 다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그의 다스리심이 얼마나 모든 영역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사회가 정치, 경제, 군사적인 문제들 때문에 흥망성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하느냐 불순종 하느냐가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었다는 그 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신자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내용으로 , 신앙이 개인의 기호의 문제로 축소되고 배제되는 시대정신 속에 살고 있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태양의 빛 아래에서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듯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했는데.. 빛이 가리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빛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어떤 존재인가? 눈을 뜬 자이다. 눈을 떠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는 자요, 그가 이 세상을 지금 다스리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분이 살아계셔서 다스리시는데 어떤 시대, 어떤 환경, 어떤 조건에서도 예외없이 그분이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인 인생과 삶의 문제만이 아니라, 본인과 본인이 속한 사회, 나라에 역사에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을 신자들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로서 다루신다. 성경은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자연재해나 인간의 죄악된 문화나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 차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의인 열 명이 있느냐 없느냐로 운명이 갈린 것으로 증언한다.  선지서에서도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시대의 불신앙으로 얘기한다. 특히 왕 한 사람의 불신앙을 말할 때도 있다. 대표성이다. 특이하게 부정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의 부패성 가운데에서 부패한 한 왕이 나오는 것이다.  윈스턴 처질경이 "모든 나라는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지게 된다"고 했고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보다 20년 연배였던 헤르만 바빙크 목사는 "범죄자와 범죄들은 특이한 부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성원인 그 사회에서 나온다"(The transgressors and criminals are not a peculiar race, but come up out of the society of which we are all members.)고 그의 책 "Magnalia Dei"에서 말했다.


  우리가 기독교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 한 사람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이 시대와 이 사회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창조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의 개인의 신앙이란 그 시대 속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 섭리의 표징이다.


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담은 오늘이라는 그릇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루 살이 인생처럼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한 사회에 속한 사람으로 제 역할을 함에 있어서, 시민으로서의 어떤 본분, 가족과 이웃간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사는 일들이, 특별한 초자연적 역사없이 살아지고 있다면, 미래에도 여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염려란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어서는 않된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기도다. 내일이 되서 또 고민하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도록 내일꺼까지 오늘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빈자든 부자든 모두에게 해당되는 기도 모범이다. 평생 먹고 남을 양식이 있는 부자들에겐 이런 기도가 무용지물일까?  아니다. 그도 역시 매일의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양식이란 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선 세상의 어떤 부요함도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고, 그에게 좋은 것으로 혜택을 베풀 수 없다. 예컨대 부요함이 빈자에겐 선망의 대상이요 행복한 삶의 열쇠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알겠는가? 부요한 자의 마음이 얼마나 궁핍한지를. 높아진 자가 얼마나 큰 두려움에 쌓여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매일의 양식’이란 것도 과도하게 탐하지 말라는 것이 기독신자의 물질관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 그리고 의식주의 문제는 성속대비의 문제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이루게 될 거창한 신앙적인 명분, 큰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는 얘기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미래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어떤 대단한 헌신을 드리는 것을 목표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나 몇 년 후에 하나님께 드리게 될 대단한 헌신과 소위 어떤 비전들 때문에 오늘을 그의 백성답게 사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을 그렇게 신자답게 산다는 건 하루 하루 성실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이신 일들을 좇아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먹고 입고 마시는 일 속에서 그런 성격을 드러내고 이루어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 개인과 내가 속한 회사, 공동체 사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바로 그런 하루 하루가 쌓여서 미래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있는 곳이, 오늘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자리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전적으로 다스리시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옛 신앙의 선배들이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라”고 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어떤 큰 업적이나 공로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자리를 끝까지 그의 백성으로 잘 지켜내는 것이요,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들이 사소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작은 일에,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맞춰져야 한다.  마태복음 25:40절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은 사소한 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여기 작은 자는 누군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와줘도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 외면해도 내게 손해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소한 일들,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매일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큰 일에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오늘 하루의 삶이라는 그릇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내일의 신앙을 결코 담아낼 수 없다. 내일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느라 오늘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물론 주님은 그런 모든 계기들 넘어서 일하심으로 사실상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과 은총이 우리의 삶의 최종적 원인이라 하겠다.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