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어떤 분야 즉, 자기의 관심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때로는 너무나 많은 정보의 양으로 인해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판별해 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할 때도
있다. 가히 정보의 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기능적 사회로 갈수록 조작의 가능성은 더 심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지식이란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주어지는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쌍방향 교환이나 혹은 정보의 크로스 현상도
점점 다양화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다양하고 많은 양의 정보들이 들어가 있고, 또 수시로 원하는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는 수단들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보들이 항상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제 또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도 이 시대는 신앙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제공받으며, 또 원한다면 더 많은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일방주의적 체제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시대에 맞게 새로운 요소들을 적절하게 첨삭하면서 변화해 왔다.
더 이상 중세의 그 고압적이고 엄숙주의적인 태도들로는 더 이상 신도들을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한껏 더 낮아져서 그들의 고민과 문제들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좀더 신비적이고
교회 밖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체험들을 제공하고자 했다. 현대의 많은 신비주의 운동들 가운데에서는 로마 가톨릭에 뿌리를 둔
것들이 많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기독교 매체들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의 설교와 성경공부, 새로운
가르침들을 쏟아내고 있다. 국내 일간지 한 면 전체에 이미 이단으로 분류된 자의 사술같은 가르침이 버젓이 실려지고 있는데, 그는
교묘하게 전통적 기독교의 내용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이제는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대단히 발달한 도시 아테네를 방문하였을 때 그가 보았던 것은 그
문명의 화려함과 찬란히 빛나는 유적들이 아니었다. 그는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에 분게함”을
품었다. 사도는 아테네 사람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평가했다. 사도는 그들의 헛된 우상에 대해서 여러 말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변론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치 않으셨지만,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회개하라고 명하셨음을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이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종교성 많았던 사람들에게 외쳤던 사도의 그 설교가 여전히 종교성이 풍부해지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같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 심판할 날이 작정되었다. 두렵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