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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사 찰스 피니의 자리는 어디인가?

소박한 나그네 2011. 10. 3. 00:12
미국 부흥운동의 유명인물 중 한 사람. 찰스 그랜디슨 피니 (1792-1875),

그는 1821년 "뉴욕 아담스"에서 법률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복음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명성을 미 전역으로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그가 미국 장로교 교회역사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다음의 평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830년 초 전통적인 장로교와의 결별이 완료되었다. 그는 장로교에 대한 평가를 '조직적 핸디캡 아래 수고하는 것'으로 보았고, 장로교 신학에 대해서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무시한다'고 했다.

피니의 부흥운동 전개 방식에서 "열망의 좌석"(anxious bench)은 감리교적 행위로 전이되었고, 후기 부흥운동 사상의 규범이 되었다.   열망의 좌석은 특별히 고안된 자리로 보통 설교단의 앞자리에 있었고, 피니는 그 좌석에 있는 사람들을 기도하기 위해 부르거나 그들 영혼의 상태에 대해 훈계를 받게 했다.  이것이 '새방법' 중 하나로 피니의 집회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특히 피니는 이전 부흥가들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순간을 내버려두기를 선호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만일 개인들에게 회개하도록 명령하였다면 그들이 즉시 그렇게 하게 할 수단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열망이 좌석에 대해 피니는 '만약 당신이 죄인에게 여기 열망의 좌석에 있으니 나와서 주님의 자리에 서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고백하시오 라고 말했으나 그가 그처럼 작은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니의 이 '새방법'은 회심에서 인간의 행위를 너무 강조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거의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신학은 존 웨슬리보다 더 알미니안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예비된 은혜를 떠나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주장한 반면 피니는 이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누구든지 전심으로 찾으면 더 높은 영적인 삶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완전주의자였다.
<마크 놀/최재건, "미국.캐나다 기독교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