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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소박한 나그네 2011. 5. 9. 23:56
신앙적인 논쟁의 문제들에서

어떤 싸움을 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최근의 한 문제를 겪으면서 싸움의 내용과 함께 싸움의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와 더불어 신앙에 있어서 승리란 때로는 옳음을 증명하고도 패배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일 오후에 교회사(P.Schaff)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과 잘 어울어지는 한 부분을 접하게 되었다.

스위스 지역에도 종교개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두주자로 쮜리히의 쯔빙글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 의회는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이유는 의회의 대부분은 세습 귀족과 왕족들로 채워졌고 그들은 일반 대중들보다는 보수적이었으며 구교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된 개혁의 요구를 모른체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의회는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 논쟁은 "가톨릭 도시였던 바덴의 아르가우에서 1526년 5월 21일에 열려 6월 8일까지 18일간 열렸다."  로마 가톨릭측은 다수였고 신교측은 극소수였다. 분위기로 보아도 신교도측은 불리한 입장이었다. 
쯔빙글리에 대하여 "책을 읽기보다는 암소들의 젖을 더 많이 짠 사람"이란 조롱과 함께 신교도 측 사람들은 "거지와 같은 불쌍한 오합지졸들"이라고 폄하받았다.
더군다나 회의 진행 방식에서도 "매일 아침 미사가 행해졌고...화려한 의식주의가 발현되었으며..사회자와 핵심 서기들이 가톨릭 신자였고,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논쟁의 주제는 "실제적 임재(성찬에서), 미사의 희생,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원하는 문제, 성상, 연옥, 원죄"등 이었다.

바젤에서 온 "오이콜람파디우스"와 베른의 "할러"는 개혁파 견해를 옹호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오이콜람파디우스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원칙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저술에 관한 박식함과 견실한 논증"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친구들은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고함치는 데 졌다"고 했다.   이런 평판은 심지어 가톨릭파 사람들도 "이 창백한 사람이 우리 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교황파가 승리했다. 모든 개혁안들은 금지되었다.
쯔빙글리는 파문되었고, 바젤시는 오이콜람파디우스를 목사직에서 해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개혁파의 서적 뿐만 아니라 이들이 펴낸 성경들도 불타우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가 항상 옳은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승리도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바덴 논쟁은 일시적으로 로마 교황파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종국에 가서는 1519년의 라이프찌히 논쟁에서처럼 종교개혁을 널리 전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공정하게 이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개혁파들이 성경에서 비롯된 건전하고 견고한 논증들 때문이 아니라 고함과 음모, 횡포와도 같은 방책들로 인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일시적인 반동의 흐름이 있고 나서는, 옛 신앙과 새로운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몇몇 주들이 개혁에 찬성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우리는
진리와 신앙의 문제로 인해서 싸울 때 승리를 위해서 싸워서는 안 되고 옳음과 진실을 위해서 정직한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때로는 모함과 사기와 큰 세력으로 인해 잠깐 동안은 실패하고 좌절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가장 옳은 선을 놓치지 말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의 진리앞에 정직이란 이 세상에서 폭력과 권력으로 가리워질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시련과 난제들은 언제나 큰 교훈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