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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20세기 과학기술의 발자취와 명암

소박한 나그네 2010. 9. 17. 11:00

20세기 과학기술의 발자취와 명암

 

 홍성욱

(출처: '문학과 사회. 1999. 여름호')


명 실공히 20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였다.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어 새처럼 나는 꿈을 이루었고, 로켓을 만들어 달을 밟았다. 인간은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원자를 쪼갰다. "녹색혁명"이라 불리는 획기적인 농업생산의 향상이 있었으며, DNA와 유전암호의 비밀을 풀었고, 약으로 임신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생긴 이래 불치병이라고 알려졌던 결핵, 소아마비와 같은 병을 항생제와 백신으로 정복했고 이는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의 평균수명을 두 배 가까이 늘렸다. 의사들은 시험관아이를 만들었고, 얼마 전에는 양(羊)을 복제했다. 20세기 서구 문명의 상징인 라디오, TV, 자동차, 고층건물이 비서구 사회에까지 보편화되었다. 반도체를 이용해서 PC 컴퓨터를 만들었고, 인터넷과 같은 범지구(global) 통신망이 컴퓨터들을 연결하고 있다.


반 면에 과학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원자를 쪼갠 대가로 우리는 원자핵무기라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무기와 함께 살게 되었다. 새로운 화학물질과 자동차와 같은 기계는 대기·수질 오염은 물론 오존층 파괴와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는 전지구적 환경문제를 낳았다. 유전학은 인간을 유전 정보로만 간주하는 유전자 결정론과 유전적 차별의 가능성을 낳았으며, 유전공학의 발달은 유전공학을 통해 변형된 식품을 우리 식탁에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최근 양의 복제는 인간 복제라는 미증유의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보기술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있다.


이 글은 20세기 과학기술을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개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절은 20세기 과학기술의 성과를 소개하고, 두 번째 절에서 이것이 야기한 사회적·윤리적 문제를 검토하겠다. 세 번째 절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과학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절인 네 번째 절은 최근 '과학의 종말'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21세기 과학의 방향을 간단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20세기 과학기술의 성과


아 인슈타인(A. Einstein)의 상대론과 막스 플랑크(M. Planck)의 양자 가설로 20세기의 첫 장을 연 물리학은 곧이어 원자의 미세 구조를 밝히는 개가를 올렸다. 상대론은 시공간, 물질, 에너지를 혁명적으로 새롭게 보는 새로운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하이젠버그(W. Heisenberg), 닐스 보어(N. Bohr)와 같은 물리학자는 불확정성 원리나 상보성 이론에 근거해서 원자나 전자와 같은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양자 물리학의 체계를 세웠고, 이는 아인슈타인처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과학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27년 코펜하겐 해석을 기점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1930년대에 과학자들은 인공핵변환에 성공했고, 이 성공은 핵에너지를 이용할 길을 열었다. 물리학자들은 중성자, 중간자(meson), 중성미자(neutrino)와 같은 새로운 입자를 가속기와 같은 기계와 우주선을 통해 발견했고, 20세기 후반에는 쿼크(quark)라는 더 근본적인 입자가 이런 소립자를 구성한다는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이 제창되었다. 이어서 1970-80년대를 통해 여섯 가지 쿼크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입증되었다. 최근 일군의 물리학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0차원의 초끈(superstring)이 쿼크를 구성하는 더 근본적인 입자라는 가설을 발전시키고 있다.


천 문학과 우주론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우리의 태양이 속해있는 은하(the Milky Way)가 우주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20세기 천문학은 우주 속에 이런 은하수와 비슷한 은하계가 수천 억 개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으로도 그 크기를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우주에는 별 이외에도 퀘이저(quasar), 펄서(pulsar), 블랙 홀과 같은 것이 있음도 알려졌다. 1920년대 천문학자 허블(E. Hubble)은 관찰을 바탕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을 제창했으며, 이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잘 들어맞았다. 이에 근거해서 과학자들은 지금은 끔찍하게 방대한 우주가 오래 전에 (약 160억 년 전에) 한 점의 폭발에서 시작했다는 "빅뱅(Big Bang) 이론"을 제창했다. 빅뱅 이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생각할 수 없다는 안정상태(steady-state) 이론과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했지만, 우주의 배경복사(background radiation)처럼 빅뱅을 지지하는 증거가 발견됨에 따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정통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의 학의 발달은 평균수명의 놀라운 신장을 가지고 왔다. 20세기 초반에 선진국 국민의 평균수명이 45세였지만, 지금은 거의 80세에 육박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인간의 혈액형이 밝혀져서 수혈이 자유로와졌고, 곧이어 인슐린이 발견되어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 페니실린의 발견과 30년대 이의 대량 생산은 그 동안 인간이 속수무책이었던 결핵, 성병, 성홍열등 박테리아에 의해 야기된 질병을 획기적으로 치유할 길을 열어주면서 2차 세계대전에만 수백 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유아사망률의 큰 비중을 차지했던 소아마비의 백신이 1950년대에 개발되었고, 1980년 세계보건기구는 지구를 통 털어 천연두가 박멸되었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의술은 사람을 치료하는 단계를 벗어나서 신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던 새 생명을 만드는 일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1978년 첫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Louis Brown)을 필두로 다양한 생식보조기술이 발달했다. 1960년대에 "성혁명"의 기폭제가 된 피임약은 여성을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면서 여성의 사회활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장기 이식과 성전환 수술이 시작되었으며, 페이스메이커(pacemaker)와 같은 인공장기도 도입되고 점차 보편화되었다.


20 세기에는 무엇보다 생물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1900년 멘델(G. Mendel)의 유전법칙이 다시 발견되면서 다윈(C. Darwin)의 진화론과 유전학 사이에 교두보가 만들어 졌다. 이후 유전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자(gene)에 생명체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본질을 규명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유전학자였던 모르간(T.H. Morgan)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유전자의 비밀을 연구했고, 뮐러(H.J. Müller)는 X선으로 유전자의 변형을 일으켜서 돌연변이를 연구했다. 양자물리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던 슈뢰딩거(E. Schrödinger)는 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45)라는 책에서 유전정보가 마치 모르스 부호처럼 유전자에 각인 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유전자가 효소와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고, 이런 분자 생물학 연구가 축적되면서 유전자가 염색체(chromosome)의 DNA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생명체의 비밀이 유전정보의 형태로 DNA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DNA 의 구조를 밝히는 것은 1950년대 초반 최고의 숙제였다. 1953년 제임스 왓슨(J.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 Crick)은 라이너스 폴링(L. Pauling)이라는 거장을 따돌리고 DNA의 이중나선 구조와 그 복제의 메커니즘을 최초로 규명했다. 이후 1959년 크릭에 의해 DNA의 명령과 RNA의 매개에 의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난다는 "센트럴 도그마"(the Central Dogma)가 제창되었고, 1960년대에는 세 개의 염기의 조합으로 20개의 아미노산이 합성되는 유전자 암호(genetic code)의 신비가 벗겨졌다. 이후 1970년대에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서 복제하고 이를 다른 곳에 붙일 수 있는 유전자 재조합 (Recombinant DNA)의 방법이 실용화되면서,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의 새 장을 열었다. 동식물은 물론 인간의 다양한 유전자들의 배열과 그 기능이 발견되었고, 이는 환경과 유전이 인간의 지능, 행동,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았다. 1990년에는 인간의 게놈에 있는 30억 개의 염기의 배열과 유전 정보를 모두 알아내는 인간게놈계획(Human Genome Project)이 출범했다. 인간게놈계획은 21세기의 원년인 2001년에 첫 보고서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 술의 발전도 과학의 발전 못지 않게 눈부신 것이었다. 20세기는 1903년 라이트 형제(the Wright Brothers)가 엔진을 단 비행기 Flyer기를 만들어 창공에 띄운 것을 기점으로 인간이 하늘과 우주를 정복한 시기였다. 독일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로켓을 만들었고, 1957년 소련은 첫 번째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호를 발사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고 그를 무사히 귀환시키겠다고 공언했고, 이 공언은 1969년 아폴로 11호가 우주인을 달에 보냄으로써 현실화되었다. 미-소의 우주경쟁에서 파생한 통신위성은 전 지구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낳았다. 전 지구적 소식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고 지구 오지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맥루헌(M. McLuhan) 같은 미디어 학자는 이를 보면서 1967년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통 신기술과 컴퓨터의 발전 또한 괄목할 만 했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부터 라디오가 가정에 보급되었고, 1940년대에는 TV가 보급되었다. 1937년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 Turing)은 인간 두뇌의 논리적 사고를 수행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함을 보였고, 이는 1940년대 ENIAC이나 EDVAC같은 컴퓨터의 탄생으로 실현되었다. 1949년,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W. Shockley)와 동료들은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는 거추장스럽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진공관을 대체함으로써 20세기 후반기의 전자혁명을 출범시켰다. 트랜지스터가 개발되고 10년 후에 첫 집적 회로(IC)가 만들어졌다. IC는 처음에는 컴퓨터의 메모리로 사용되었는데, 1970년대에는 이를 사용해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개발되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두뇌와 같은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애플, IBM PC와 같은 개인컴퓨터(PC)의 개발과 보급을 가져왔다. 1960년대부터 엔지니어들은 컴퓨터를 계산기만이 아닌 통신기기로 사용하는 법을 모색했는데, 이런 노력은 1970년에 미국 고등군사연구소(ARPA)의 네트웍인 Arpanet을 낳았던 동력이 되었다. Arpanet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통해 서서히 확장되었고 결국 인터넷의 모체가 되었다. 이후 워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과 웹 브라우저 모자익(1993), 넷스케이프(1994)는 과학자들이 사용하던 인터넷을 전세계 인구를 연결하는 범지구적인 네트웍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상징으로 부상했다.


20세기 과학기술이 야기한 새로운 문제들


물 리학과 의학의 발달이 20세기 과학의 개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물리학과 의학이 각각 원자폭탄과 우생학(racial hygiene)에 의한 대학살(Holocaust)을 낳았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 근대 합리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라면, 근대 합리성의 정점에서 과학의 최고 성과가 대량살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경악할 만한 사실이었다. 20세기 후반의 많은 사상가들이 근대라는 틀을 버리고 탈근대(postmodern)라는 새로운 틀로 이주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2 차 대전 이후 물리학의 발전과 군사적 필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2차 대전은 레이더(radar)에 의해 승리했고, 원자탄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 정도였는데, 레이더와 원자탄은 각각 MIT의 방사능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와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에서의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바탕한 것이었다. 과학과 군사적 필요와의 밀접한 관계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이어졌다. 물리학자들은 1950-60년대 수소폭탄 연구에 동원되었고, 핵미사일의 개발, 유도장치의 개발, 레이저무기의 개발, 정찰위성의 개발에 투여되었다. 국방성의 거의 무제한의 지원을 바탕으로 물리학은 점차 거대과학(big science)으로 변했다. 20세기 후반 미국과 소련, 유럽에서 세워진 거대한 입자 가속기들이 세워진 데는 소립자의 비밀을 연구한다는 내적 필요도 있었지만, 이런 가속기의 개발이 냉전 상황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물리학자들의 주장이 정부에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큰 가속기를 만들면 이것은 미국 과학자들에게 더 큰 가속기를 위한 돈을 요청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이러한 거대 과학의 흐름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 수많은 과학자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1993년 미국 의회는 110억불이 소요하는 초전도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collider: SSC)의 예산지원을 취소했다. 21세기에도 물리학의 연구는 계속 될 것이고 많은 젊은 과학도가 자연의 신비를 캐기 위해 물리학으로 몰릴 것이지만, 20세기 후반에 미국이나 소련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거의 무한정의 사회적, 재정적 지원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학의 군사화는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인류는 한때 수소폭탄을 70,000여기 보유한 적이 있었으며, 이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깡그리 멸종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파괴적인 것이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분명한 군사적 필요 때문에 과학연구를 지원했지만, 전쟁을 통해 팽창한 과학은 자체 유지를 위해 군사적 도움을 필요로 했고, 이는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핵무기는 적의 가상 핵 공습 시나리오에 대한 게임이론을 발전시켰다. 물리학, 전자공학, 컴퓨터과학은 물론 심리학과 인류학까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지원되었다. 가상 핵 공습은 이를 조기에 경보하는 경보 네트웍을 낳았고, 컴퓨터 통신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전쟁 과학기술에의 투자와 이의 발전은 냉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고착시켰다. 또 과학의 군사화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원리나 이론보다는 당장 기술에 응용 가능한 도구적 지식에 집중하는 경향을 낳기도 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개방적인 연구의 교류보다 비밀연구에 익숙해졌다. 군사연구에 대한 반대는 월남전을 거치면서 격화되었고, 1970년에는 MIT에 모인 과학자들이 군사연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군사 연구를 추진하던 대학의 실험실이 반전운동세력에 의해 습격 당하기도 했다.


화학의 발전이 가져온 수많은 화학물질이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다는 사실은 1960년대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살충제로 널리 쓰였던 DDT가 자연 생태계의 먹이 사슬을 파괴해서 자연에 치명적인 해악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레이첼 칼슨(R. Carson)의 「침묵의 봄」(1962)과 같은 책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근대 과학의 이면에 자연과의 공존을 경시하고 이를 인간의 편의를 위한 정복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침략적"인 세계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환경운동은 자연에 더 친화적인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칼슨의 경고가 있고 난 10년 후인 1972년에야 미국 정부는 DDT를 금지시켰고, 그로부터 몇년 후 오존층에 구멍을 낸다는 이유로 스프레이 등에 널리 쓰였던 CFC가 금지되었다. CFC의 금지는 어렵지 않게 국제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자동차 배기가스가 내 뿜는 이산화탄소가 온실효과를 일으켜 지구 온난화를 가져온다는 문제는 상반된 과학이론과 상이한 이해관계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아직 국제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 이외에도 쓰리마일 섬과 체르노빌에서의 원전 사고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20세기 후반을 통해 과학기술이 야기한 환경문제는 가장 심각한 "전지구적"(global) 문제로 부상했던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유전학과 생물학은 인종과 성차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우생학자들은 흑인이나 동양인이 백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강조했으며, 백인의 우수성이 지능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열등한 인종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1924). 우생학의 또 다른 주장은 "세상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형태로 드러났다. 노동자 계급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술주정뱅이이기 때문이고, 게으름이나 주정은 유전적이기 때문에 국가가 이들을 위해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빈자, 유전병을 가진 사람들, 불구자, 정신박약자, 동성연애자들이 다 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의 범주로 분류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이런 사람들을 강제로 거세(sterilization)시키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후 나치정권의 독일에서는 유전적인 결함을 가진 아이를 국가가 안락사 시키는 법이 통과되었고, 이는 곧바로 17세 청소년까지 확장되었다. "사회적으로 부담만 주는 사람들을 제거한다"는 생각은 아리안(Aryan) 인종이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과 유태인에 대한 혐오주의(anti-Semitism)와 결합해서 히틀러에 의한 대량학살의 참극을 가져왔다. 2차대전 기간동안 유태인을 포함 6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살해되었다.


인간 게놈계획을 비롯한 생물학의 발전은 우생학이 지나간 옛날 얘기만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이상이 없고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여러 가지 태아 검사(prenatal screening)를 하고 아이가 유전적 결함이 있는 경우 유산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가가 개입을 안 하지만,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아이를 낳는 것이 어느덧 부모의 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개개인에게 돌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인간게놈계획의 성과와 유전자 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부모가 원하는 아이를 마음대로 만들어서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태아의 머리색, 재능, 키, 건강을 유전자 재조합을 통해 마음대로 선택해서 낳는 다는 것은 어느덧 <가타카>와 같은 공상과학영화의 얘기만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가진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식들에게 좋은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의 일부 계층만이 값비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아이를 만들 경우, 유전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이는 21세기 새로운 사회적 갈등을 낳을 수 있다.


과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의 등장


고 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철학은 상호작용을 거듭해 왔다. 20세기 원자 물리학의 발전은 상이한 자연 현상의 밑바닥에 동일한 입자로 구성된 원자라는 기본 구조가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냈고, 이는 러셀(B. Russell),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같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과학철학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는 논리(logic)와 경험명제(empirical statement)가 과학의 모든 언술을 구성하는 "원자"라고 주장했다. 논리 실증주의에 의하면 과학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설이 실험결과에 부합할 경우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으로 발전하면서 진보하는 것이었다. 논리와 경험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기에 자연과학도 객관적, 보편적인 성격을 띄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과학에 사회·문화적 요소가 영향을 미칠 소지는 지극히 적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분석한 자연과학은 사회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에게 객관적인 지식의 모델이 되었다.


논 리 실증주의는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의 관찰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핸슨(R. Hanson)같은 과학철학자는 과학자들의 이론이나 선입관이 과학의 경험을 규정함을 보였다. 해가 솟는 것을 보면서 지동설주의자는 "해가 돈다"하고, 천동설주의자는 "지구가 돈다"고 다른 관찰명제를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과학철학자인 콰인(W.V.O. Quine)은, 관찰의 결과가 이론과 모순이 될 때 이론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 덧붙여져서 기존의 이론을 구제함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토마스 쿤(T. Kuhn)은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이 완만한 시기와 급격한 혁명의 시기를 반복해서 거치면서 변화한다고 하면서, 한 시기의 과학을 특징짓는 가설, 이론, 개념의 총체인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는 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치 종교적 개종과도 같은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가 개입함을 과학사의 다양한 예를 들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쿤에 의하면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인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과학의 역사를 두고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논리실증주의는 핸슨, 콰인, 쿤 등의 새로운 과학철학에 의해 파기되었다.

쿤 의 과학혁명 이론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혁명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쿤은 "과학자 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패러다임을 과학자 사회가 공유한 어떤 규범과 같은 것으로 정의했다.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풀 문제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것의 의미,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까지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패러다임의 범주 안에서, 패러다임을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해 수행되는 과학이 정상과학이었다. 18세기 동안 화학, 전기, 자기 현상을 뉴튼(I. Newton)의 근거리힘(short-range force)이라는 개념과 뉴튼의 수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해결하려했던 시도는 뉴튼과학의 패러다임과 그 속에서 수행되었던 "문제 풀이" 식의 정상과학의 예를 잘 보여준다. 쿤의 설명에서 특히 흥미 있었던 부분은 과학혁명의 시기에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과학외적(外的)인 요소가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 점이었다. 과학혁명기에 두세 개의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경쟁하고 있을 때 어느 것이 우월한가를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선택에 다른 요소들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17세기 초엽에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의 지동설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 태양을 중시하고 자연에서 수학적 마술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s)들이 많았던 것은 과학적 패러다임의 선택에 철학적, 비합리적 요소가 영향을 미친 경우의 일례였다.

쿤 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자연과학의 모델을 추구하던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었던 자연과학마저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사회과학이나 역사학, 또는 법학과 같은 분야가 더더욱 그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이런 학문분야 전반에서 등장한 "포스트모던 전환"은 자연과학에 대한 신념이 붕괴했다는 공통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학의 경우, 과학적 방법을 응용해서 객관적인 "역사적 법칙"을 찾는 무의미한 시도를 계속하기보다는 텍스트의 의미가 해석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언어가 가지는 이중의 역사성 -- 언어가 사회·문화적 배경을 담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문화적 배경을 창출한다는 -- 에 주목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문학비평, 철학, 사회과학, 인류학, 법학 분야에도 비슷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자 연과학을 보는 시각은 1980년대에 들어 더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엽에 에딘버러 대학의 일군의 과학사학자, 과학사회학자는 쿤의 영향하에 과학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를 주창했다. 이들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과학지식의 형성에 직접 개입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이 참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학과 비과학, 합리와 비합리, 참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면서,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과학자가 다양한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밑천"(resource)만이 아니라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사회·문화적 밑천에 둘러싸여 있으며, 과학자의 실천은 이런 밑천을 잘 이용해서 자연의 실재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론이나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기술했다. 과학 이론과 법칙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과정이었고, 많은 경우 사회적 협상이 개입되는 것이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TRF라는 호르몬이나 쿼크(quark) 입자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과 학자들은 과학지식이 사회적 협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다. 일부는 이런 주장을 반과학(anti-science)이라고 몰아 부쳤고, 또 다른 과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을 "강단좌익"이라고 비난했다. 과학자들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은 1990년대 중반 "과학전쟁"(Science War)을 겪으면서 몇 차례 충돌했다. 이런 논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과학지식이 사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극단적인 상대주의나 비실재론은 근대 과학의 다양한 특성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게 되었다. 과학지식, 과학활동과 다른 사회적 요소의 상호작용은 일방적이 아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과학자가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라는 객관적 실재를 무시하고 사회적 요소만으로 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듯이, 과학자의 발견과 이론을 마치 탐험가가 무인도를 발견하듯이 설명할 수도 없다. 자연과 사회는 종합적으로 과학자의 실천을 규정하고, 또 과학자의 실천에 의해 변형된다. 사람들은 이 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일반화하기 힘들다는 것을 최근에야 서서히 깨닫고 있다.


"과학의 종말"이 가까워졌는가?


1996 년 미국의 유명한 과학대중지 Scientific American의 기자 존 호건(J. Horgan)은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뇌과학, 카오스-복잡계 과학, 인공지능 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책 「과학의 종말」(The End of Science)을 출판해서 큰 반향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과학이 종말을 고한다는 그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그의 세 가지 관찰에 근거하고 있다. 먼저, 과학은 철학이나 문학비평과 달리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는 활동인데, 20세기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학이 던질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대부분 찾아 졌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자 구조를 밝혔고, 진화와 그 메커니즘을 알아냈으며, DNA와 유전 암호를 해독했고, 빅뱅이론을 세우고 이를 검증했다. 이러한 성과보다 더 중요한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호건의 입장이다.

과 학이 종말을 고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회적, 문화적인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수십-수백억 달러가 요하는 과학프로젝트는 더 이상 국가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졌고, 이는 과학의 발전에 심각한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초전도가속기(SSC)가 세워졌다면 입자 물리학에 또 다른 혁명적인 발전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21세기에도 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최근에 등장한 초끈이론은 10차원의 초끈을 근본적인 입자로 가정하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아름답지만 실험을 통해 입증될 수 없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향의 발전이 계속된다면 물리학은 "미학"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한 물리학자의 푸념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인간의 앎의 한계 때문이다. 빅뱅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는가 라는 질문은 무척 흥미 있어 보이지만,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 호건의 주장이다. 우주는 160억 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에 만들어졌고, 그 시작 이전에는 우주라는 공간은커녕 시간조차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 건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물질적, 사회적 재원 내에서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찾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에 대해 여러 반론이 쏟아졌다.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학술지 Nature의 편집인을 역임한 존 매독스(J. Maddox)는 「아직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What Remains to be Discovered)라는 책에서 20세기 과학의 성과는 "시작"에 불과하지 결코 과학의 종말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가 든 예들은 다음과 같다. 컴퓨터가 체스 게임에서 사람을 이겨도 우리는 인간의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아직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의식과 뇌에 대한 연구는 21세기 과학의 핵심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휴먼게놈계획이 성공리에 인간의 유전자의 배열과 기능을 전부 알아낸다면 이는 인간의 진화와 80,000여 개의 인간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는 베이스를 제공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인간의 진화와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21세기 생물학의 프런티어로 부상할 것이다. 물리학의 숙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양자물리학에 근거한 입자물리를 통합해서 "모든 것에 대한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만드는 것인데, 이 역시 결코 쉬운 숙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예들은 20세기 과학이 끝이 아니라 더 많은 연구의 시작임을 보여준다는 것이 매독스의 입장이다.

왜 20세기 말엽에 과학의 종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표출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튼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대양에서 조개껍질 하나를 주슨 것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피의 순환이론을 제창한 윌리럼 하비(W. Harvey)도 "우리가 아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것에 비하면 무한소에 불과하다"고 했다. 생리학자 할데인(J.B. Haldane)은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기묘할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기묘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에게 과학적 탐구는 항상 열려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 면에 과학이 종착점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던 과학자들도 많이 있었다. 1871년 캐븐디쉬 연구소 소장 취임 연설에서 맥스웰(J.C. Maxwell)은 "근대 물리 실험은 본질적으로 측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몇 년 내에 모든 물리 상수가 근사 값으로 측정될 것이며 따라서 앞으로 과학자들이 할 일은 이 값을 소수점 하나 더 아래 자리까지 측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어서 19세기 말엽 미국의 물리학자 마이켈슨(A. Michelson)은 "물리학에서 통합하는 원리는 대부분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양자 물리학자 막스 보른(M. Born)은 1928년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은 6개월 내에 종언을 고할 것이다"고 했으며, 밀리언셀러 「시간의 역사」에서 스티븐 호킹(S. Hawking)은 "우리는 자연의 궁극적인 법칙에 대한 추구의 종점에 도달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호 건은 과학에서의 발견을 지구의 탐험에 비교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구의 구석구석을 탐험한지 벌써 몇 백년이 지났고, 또 중요한 발견들이 이미 대부분 이루어 졌기 때문에 남극 대륙을 발견한다던 지 밀림 속에 숨은 거대한 도시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발견이 더 이상 이루어지기 힘든 것처럼, 과학에서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발견이 더 이상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매독스는 과학의 발견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지만, 호건의 비유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과 학을 탐험에 비유함으로써 과학이 종점에 가까워진다는 호건의 주장은 과학에 대한 소박한 실재론적인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의 역사는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이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찾아짐을 보이고 있다. 즉, 과학의 발견은 지구의 오지를 탐험하는 식이 아니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식이었다. 양자물리학이 출발한 흑체복사라는 문제는 거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제였다. 18세기 생물학자들은 19세기 생물학자들을 매료시키고 격렬한 논쟁을 가져왔던 "진화"를 의미 없다고 간주했고, 19세기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21세기 과학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지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무엇인가를 봄으로써 예측하는 것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은 항상 예기치 않던 문제로부터,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열리는 것이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지금 우리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 안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 학을 탐험에 비유하는 호건의 주장의 또 다른 문제는 실제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하는 일이 "제 2의 자연"을 만드는 것임을 간과했다는데 있다. 과학자들은 진공펌프를 이용해서 진공을 만들어 이를 탐구했고, 전류를 만들었고, 전자기파와 엑스레이, 인공핵변환을 만들었다. 자연은 이런 "현상의 창조"(creation of phenomena)에 의해 끊임없이 그 변경을 확장해 왔다. 과학자들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 가는 새로운 기기와 기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물론 이런 기구의 발전에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경우가 많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이 만드는 제 2의 자연은 하나의 학문 분야와 또 다른 학문 분야가 상호작용 하면서 무한정으로 생길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조건의 생성에는 과학 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기술적인(technological) 요소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지식의 생성은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1세기가 20세기와는 다른 모습의 사회가 될 것인가? 그 답이 "그렇다"이면, 21세기 과학이 20세기 과학과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닐 것이라고 예측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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