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트호트 뮬러 지음
(본서는 저자의 몇 가지 저서를 편집 번역한 책이다)
제 1 부
제 1 장 격변하는 세계와 기독교
제 2 장 왜 성서 해석을 에워싸고 논쟁을 하는가?
제 1 장 격변하는 세계와 기독교
1. 현대 세계와 삶의 의미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 현대에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변했는가?
- 현대인에게 신앙은 어떻게 비치는가?
- 우리는 오래된 신앙을 현재와 미래 세계에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
- 기독교 신앙이 뒤떨어진 중세적 세계관이 아니라 변화된 현대에서도 힘과 빛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답에서 신앙과 현대사회가 반목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분법적 사고를 말한다) 기독교를 무시하는 현대인이 되든가, 현대세계를 방임하는 기독교인이 되든가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후자의 경우는 현세 도피적이며 성경의 교훈과 본질에도 대립된다. 성경은 이론적 고찰도 아니고 세상에서 사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호소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세상 한복판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물질적인 부요함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그런 것들로 삶의 의미는 만족될 수 없다.
이 물음은 '사회주의화'나 '세계 평화', '권위주의 해체' 등으로 피해갈 수 없다. 가장 완전한 사회 체제도 이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없다.
2. 세계상의 전환
세계상의 전환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자.
먼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오늘날 우주과학의 결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게의 지극히 작은 별에 불과하며 은하계 속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중세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17-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천문학적 통찰을 갖지 못했다. 이른 시기에 과학적 사고를 했던 이태리 철학자 브루노(1548-1600, 코페르니쿠스의 세계상을 인정함)는 화형 당했다.
교회가 더 이상 과학에 대해서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런 통찰은 교회가 어떤 형태(혹은 영역)의 진리에 대해 권한인 허용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뮬러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고자 한다. 과학이 종교의 영역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3. 인간상의 전환
중세 인간상은 내세 지향적이어서 현세적이지 않고 천상적이었다. 당시의 설교는 엄중한 심판과 지옥에 대한 것이었으며, 예술가들의 작품 속의 주제도 그러하였다. 교회가 복음의 위로보다 위협하지는 않았는지...
현대는 '현세 향락주의'이다. 이사야 22:13.
우리는 '소비문화'의 시대에 산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까지 신앙과 예배가 사회적 책임의 자각과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해 왔다. 그러는 사이 현대인들의 소비적 성향은 범죄, 마약중독, 자살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 궁핍했던 시절이 더 건강하고 충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런 과잉 속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에게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세의 질병은 악령에 지배받는 것으로 인식했다.
오늘날 의학은 질병의 원인과 병원체들을 발견했고 적절한 방법으로 극복시켰다. 우리의 평균수명은 연장되었다. (여기서 본서는 1970년대 저서이므로 인공장기 등을 미래적 전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 50년에서 100년 더 늘어난다 해도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질병들은 신체에서 정신질병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그것도 사회 보장이 잘 된 나라에서 삶에 대한 불안과 상실감이 더 크다.
고트호트 뮬러 지음
(본서는 저자의 몇 가지 저서를 편집 번역한 책이다)
제 1 부
제 1 장 격변하는 세계와 기독교
제 2 장 왜 성서 해석을 에워싸고 논쟁을 하는가?
제 1 장 격변하는 세계와 기독교
1. 현대 세계와 삶의 의미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 현대에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변했는가?
- 현대인에게 신앙은 어떻게 비치는가?
- 우리는 오래된 신앙을 현재와 미래 세계에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
- 기독교 신앙이 뒤떨어진 중세적 세계관이 아니라 변화된 현대에서도 힘과 빛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답에서 신앙과 현대사회가 반목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분법적 사고를 말한다) 기독교를 무시하는 현대인이 되든가, 현대세계를 방임하는 기독교인이 되든가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후자의 경우는 현세 도피적이며 성경의 교훈과 본질에도 대립된다. 성경은 이론적 고찰도 아니고 세상에서 사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호소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세상 한복판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물질적인 부요함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그런 것들로 삶의 의미는 만족될 수 없다.
이 물음은 '사회주의화'나 '세계 평화', '권위주의 해체' 등으로 피해갈 수 없다. 가장 완전한 사회 체제도 이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없다.
2. 세계상의 전환
세계상의 전환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자.
먼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오늘날 우주과학의 결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게의 지극히 작은 별에 불과하며 은하계 속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중세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17-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천문학적 통찰을 갖지 못했다. 이른 시기에 과학적 사고를 했던 이태리 철학자 브루노(1548-1600, 코페르니쿠스의 세계상을 인정함)는 화형 당했다.
교회가 더 이상 과학에 대해서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런 통찰은 교회가 어떤 형태(혹은 영역)의 진리에 대해 권한인 허용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뮬러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고자 한다. 과학이 종교의 영역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3. 인간상의 전환
중세 인간상은 내세 지향적이어서 현세적이지 않고 천상적이었다. 당시의 설교는 엄중한 심판과 지옥에 대한 것이었으며, 예술가들의 작품 속의 주제도 그러하였다. 교회가 복음의 위로보다 위협하지는 않았는지...
현대는 '현세 향락주의'이다. 이사야 22:13.
우리는 '소비문화'의 시대에 산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까지 신앙과 예배가 사회적 책임의 자각과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해 왔다. 그러는 사이 현대인들의 소비적 성향은 범죄, 마약중독, 자살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 궁핍했던 시절이 더 건강하고 충실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런 과잉 속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에게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세의 질병은 악령에 지배받는 것으로 인식했다.
오늘날 의학은 질병의 원인과 병원체들을 발견했고 적절한 방법으로 극복시켰다. 우리의 평균수명은 연장되었다. (여기서 본서는 1970년대 저서이므로 인공장기 등을 미래적 전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 50년에서 100년 더 늘어난다 해도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질병들은 신체에서 정신질병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그것도 사회 보장이 잘 된 나라에서 삶에 대한 불안과 상실감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