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법칙이다.
John Calvin
딛 1:15-16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사도 바울의 시대에 끊임없이 교회를 괴롭히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의 헛된 율법을 세워놓고 지키고자 했던 우매한 자들이었다. 거룩하고 온전한 삶이란 인간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성전은 이미 우리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부연컨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의식에 맹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한 마디로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금지된 음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의 건강 따위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反)하는 계율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마치 그들의 스승인양 떠받드는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인간의 선호도에 따라 혹은 그들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좇아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축복들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뜻은 생의 자양분으로써 그것을 섭취하라는 것이지 돼지처럼 탐욕을 만족시키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우리 삶이 원하는 만큼 풍요롭지 못하면 인내로 견딥시다. 우리가 부유함을 누리듯이 가난에도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합시다. 또 우리의 주께서 우리가 원하는 바 이상을 주셨다면 늘 금욕하는 자세를 길러야 한다.
롬 13장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가졌다고 만족해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적합한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 인간이 비록 정결치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으신 바 된 짐승은 물론 깨끗하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깨끗할 수도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말한 “만물이 다 깨끗하다”는 의미는 만물 그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사 받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만물은 믿음과 은총에 대한 감사를 통해 우리에게 성별 되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에게 쏟으시는 그분의 부성애적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놀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충만하게 채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토록 충만하게 채우시는 까닭은 그가 인간을 향해 얼마나 풍성하게 베푸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함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만일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보호자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또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들이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으며 빵 한 조각 떼는 것조차도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축복을 올바로 누리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를 먹이시고 부유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정결함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만 내린 축복을 시기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 손에 맡기면서 그것이 오직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줄을 알 때 만물은 비로소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렇다면 이 깨끗함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믿음을 통해 정결케 되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즉 주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심으로써 정결케 되었다는 것이다(행15).
여기서 베드로는 영원한 구원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값을 치루신 구속자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자신을 알려주신 후에야 비로소 깨끗게 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후에 우리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이 세상에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추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축복을 얻기 전에는 고기 한 점 먹는 것조차 도적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깨끗해질 때 모든 음식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주저함 없이 모든 음식을 깨끗한 것으로 받아들여 먹을 수 있다. 만약 인간 영적인 계율을 다른 이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못된다. 그러한 강요에 우리가 맹종하는 것은 곧 모든 법을 통괄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통치자들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인간에게 지나친 우월성을 부여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그들의 올무에 얽매이도록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능력과 위력은 약화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영혼을 통치하는 일은 하나님 손에서만 건전하고 안전하게 행해진다.
어느 면에서 보면, 우리가 인간의 관습이 반역행위보다 더 나쁜 것일 수 있다. 관습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탈하여 그것은 일순간의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바치는 행위이다. 바울은 한낱 그림자일 뿐이며 지극히 외향적인 율법에다 인간을 얽어매는 유대인들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우리에게 규명해주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 끝 날까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옛 조상들이 썼던 멍에를 우리도 써야 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친다.
주께서는 그처럼 우리를 자유 가운데에 두셨는데 어찌 벌레 같은 하찮은 우리들 인간이 마치 하나님은 그리 현명치 못하다는 듯이 감히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럼에도 로마 교도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피력하면 그들은 바울도 율법으로 금하는 짐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대답한다. 그렇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 대답이 과연 얼마만큼의 합당한 목적이 담겨 있으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보자. 바울은 금지된 짐승을 먹는 것은 합법적이며 ‘모든 만물은 다 깨끗하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먹는 것에 관련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옛 조상들처럼 예속 상태로 우리를 묶어두시지 않는다.
주께서는 이전의 세우셨던 그의 계명을 파기하시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건만 인간들은 그러한 뜻에 만족하지 못하고 임의로 새로운 법을 세워 거기에 복종하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무엇보다 그들은 구약의 제한된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하고 지탱하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아이까지도 납득 가능한 분별력과 적응력으로 시대시대에 맞게 인간을 통치하고자 하신다. 이 사실을 부인한 채 인간이 고안한 율법을 내세워 무거운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나버린 법이다.
바울은 인간적 율법으로 현혹하는 자들을 경계했다. 인간의 관습을 제정하여 하나님의 계명인양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약속된 바와 역행되며, 주를 모독하는 자다. 우리가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함을 알진데, 주의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삼가고 보존하자.
특히 학개서 2장에서 구약시대에도 주께서는 그와 같은 교리로써 사람들을 훈계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성한 물건에 손을 대면 그도 신성해지는가?”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 부정한 자가 어떤 물건을 만지면 그도 부정해 지는가?” 제사장은 “부정케 된다”고 했다. 주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이 나라가 그렇고 너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외식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의 폐단이 얼마나 큰 오류라는 것을 알았다. 부정한 자가 어떤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 역시 부정케 되므로 그것은 다시 정결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 주께서 명심해야 할 바를 알려주신다. “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주를 섬기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 역시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특히 학개서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교리로써 훈계하셨습니다. 학개서에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묻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성한 물건에 손올 대면 그도 신성해지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 라는 물음에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반해, 만약 부정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도 부정해지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물건 역시 부정케 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가 그렇고 너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그러하도다. 이제 우리는 단지 외식(外式)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의 폐단이 얼마나 큰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 역시 부정케 되므로 그것은 다시 정결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명심해야 할 바를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모두가 부정하고 음란한 존재들이다 ; 그럴지라도 너희는 갖가지 제물로써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제물을 드리면서까지 너희 마음이 사악한 정욕에 물들어 있는 한, 너희의 마음이 기만과 잔인함과 악의로 가득차 있는 한, 너희의 삶은 완전히 부정하며 너희는 전혀 나의 율법을 모르는 자가 된다. 너희 행위가 비록 인간 앞 에서는 정당하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그 것을 용납할 수 없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悔改)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 역시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극히 작은 행위라 할지라도 결코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그러한 사실을 믿을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일련의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인간적 기준에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세대(全世代)에 걸쳐 만연된 폐습입니다.
위선이 담긴 사소한 의식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여기는 인간들에 대한하나님의 책망은 학개 예언서뿐만 아니고 선지자들과 유대인들간의 기나긴 갈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13-15에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고 계십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철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그것을 지기에 곤비하니라. 너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도 내가 보지 않을 것이요,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않으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아모스 5:2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않을 것이요, 살진 짐승으로 화목제를 드려도 내가 돌아보지 않으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는 인간이 단지 위선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때 그 계명은 이미 더럽혀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간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속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이사야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손엣 것을 누가 받겠느냐? 여기에 드러난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행위들이 진정으로 그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오직 그의 신성하신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결치 못한 자들에겐 아무 것도 깨끗하지 못하다던 사도 바울의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정결치 못한 까닭은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온당한 태도로써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 역시 아무런 유익함도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가르쳐줍니다 : 우리는 비록 자신들이 행하는, 바를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자찬(自贊)하며, 그 행위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깊은 장에서 깨어나는 거라고 여기지만 말입니다.
이제 초점을 돌려서 로마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들 로마카톨릭 교도들이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은 소위 말하는 적선(積善)을 통해 하나님과 화합하는 것인데, 이 적선이란 하나님이 명하신 것 이상으로 열성을 다한다는 것이라고 이들은 풀이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고, 자신의 관념에 따른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그런식으로 이들은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이들은 성도축일 이브에 금식하는 것으로, 금요일에 육식을 금하는 것으로, 헌신적으로 미사에 참여 하는 것으로, 또는 성수(聖水)를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것으로 믿으며 또한 그러한 행위들 가운데는 한점의 흠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이들은 음탕함과, 매춘행위, 거짓맹세, 혹은 기만등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악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들은 성수를 마심으로써, 조상(祖上)에 경배함으로써, 혹은 제단사이를 거니는 것 등으로 충분히 자신의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오염된 행위가운데는 한치의 순수함도, 한치의 정결함도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그러한 혐오스런 행위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겠지만,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오직 부정함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는 그들 자체가 부정하고 죄악투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거룩함이란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명(命)하신 것들을 소홀히 간과해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채 인간 스스로 재정한 법속을 맹종하는 행위는 전세대에 걸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로15~I3)이러한 폐습은 선지자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두려워함은 인간의 계명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 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이적(異蹟)을 행하리니 현명하다 일컬음 받는 자의 지혜가 사라지고 명철하다 일컬음 받는 자의 총명이 사라지리라(사29~13).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 인간의 전통에 매여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명하시고 게시는 진리는 간과해버리고 맙니다.
이사야가 인간의 전통에 맞서서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가 외치는 바는 현명하다는 자들이 어리석은 인간의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순수한 율법으로부터 벌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인간의 율법에 대한 지혜로운 눈올 가리워버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같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소위 현명한 자들은 목전(目前)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폭행과, 잔인함과, 악의, 그리고 기만행위를 떠나 올바르게 살라고 명하심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목전에 계신 하나님말씀에 한치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계명에서 빗나간 자들이며 그들의 삶 전체가 부정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온전할 수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 말씀을 놓고 묵상해봅시다 ; 화려하고 성대한 외식(外式)으로 - 그것이 비록 인간사이에서는 높이 평가받는 것이라 할지라도-우리가성화(聖化)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읍시다. 우리는 이제 자만심도, 인간적인 추측이나 하는 척하는 태도도 모두 버립시다. 그리고 진정한 겸비의 자세로써 하나님께 의지합시다. 우린 이제 탐욕과 음란함과 허세와 도적질과 모독행위 그밖의 수많은 죄악을 떨쳐버리고 두려움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힘씁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외적인 업적을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은 마치 새하얀 린넨천으로 오물덩이를 덮어두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우리의 가슴속 깊히 감추어둔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버립시다. 그러면 주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참 지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지식을 올바르게 이해하계 되면 바침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만큼 야만적으로 지음 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참 지식은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을 경우 스스로 책망 받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사탄에 눈이 먼 인간들은 복음의 진리가 아무리 그의 귓전을 울린다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현시점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토록 다양한 복음교리가 전파되어 인간을 깨우치려 하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여전히 무식한 야만인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토록 복음의 교리를 깨닫지 못하는 연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탄이 인간의 마음을 사악한 탐욕으로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변함없이 빛나되 사탄은 검은 손으로 그들의 눈올 가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생애(全生涯)를 바쳐, 영생의 결실을 맺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투명한 참 진리를 터득하는데 전력질주합시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바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척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이 방종과 죄악에 빠져있다면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생활 자체로써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조롱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자인가를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곳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면 이제 옛사람의 탈을 벗어버리시오.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그를 인정한다고 하여, 또는 그가 우리를 그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받아주셨다고 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옛사람을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사악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참지식에 눈올 떠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제 인간적 기준에 따라 우리의 행위를 평가하지 맙시다. 우리의 유익한 행위란 즉 하나님을 떠난 행위는 모두 헛되고 헛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말씀의 계명에 따라 우리의 삶의 형태를 탈바꿈시키는 법과 그를 굳건히 믿는 법, 그를 간절히 기리는 법,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법, 그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우리를 보내신 뜻이 어떤 형태이던간에 불평하지 않고 인내하는 법,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법, 혹은 만인 앞에 정직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제명인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면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조차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행위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행동은 곧 신성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유익한 업적을 이루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인간이 창안해낸 것들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하나님 말씀의 지시에만 따르도록 합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것이며,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계산법을 초월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 홀로 전인류를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모두 선하신 우리의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립시다. 그리고 우리의 결점들을 시인하고, 그 결점들을 더욱더 선명하게 인식시켜주실 것을 기도합시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우리의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토록 해주실 것을 기도합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건전한 믿음의 동참자가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든 부정함이 깨끗이 씻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토록 해주실 것을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