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사람들은 어째서 본성적으로 행위 언약이라는 옛 언약의 방식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까?
답. 본성의 언약 그리고 모든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있었을 때 맺은 언약이 있다. 사람들은, 본성에 의해 여전히 그 점에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동시에 인간은 본질상 교만하며 자기애(自己愛)적 피조물이다. 인간은 의롭게 되며 구원을 위하여 다른 것으로 은혜를 입으려 하지 않고 자기애(自己愛)적이며 자기 스스로 서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담에게서 자연적 출생으로 획득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향은 유대인들과 옛 바리새인들이 열렬히 구하였던 것이다. “자기 의를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마 19:16 눅 18:11 롬 10:3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또한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옛 갈라디아 교회가 자기들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의와 결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로마 가톨릭처럼). 우리는 본질상 율법 또는 행위언약과 결혼했다. 율법(행위언약)은 우리의 첫 신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결혼하기 위하여 반드시 율법과 이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성향은 행위언약인 우리의 첫 신랑에게 강하고 뿌리 깊게 배어있다. 심지어 경건한 신자들도 본성적으로 첫 신랑에 동경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부터 그리고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되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찾으려는 마음을 뿌리 채 뽑아내며 단념시키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율법'(행위언약)을 '이혼한 옛 신랑'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우리는 새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옛 신랑과 법적으로 이혼해야 하며, 우리 본성에 새겨진 옛 흔적들을 지워내야 한다. 그런데 문득 문득 우리는 옛 추억을 그리워 하며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는다. 마치 이스라엘에 광야를 지날 때 애굽의 추억을 그리워 하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