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묵상...>
욥은 친구들을 향해서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라고 항변한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욥은 누가 보더라도 지금 가장 형편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 재물, 자녀, 아내 그리고 몸의 질병과 마음의 낙심...
어느 것 하나 소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방문자들은 욥의 처지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 대응책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찌해야할지에 대해서 말했다.
그 충고와 책망의 말을 다 듣고 욥도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이 본문은 욥의 생각과 방문자들의 생각이 불일치하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욥은 방문자들에게 "내가 언제 그대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였는가?"라고 묻는다.
욥의 요청으로 그들이 왔든 아니든 그 점이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방문자들은 분명히 욥을 어떤 식으로든 돕고자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욥이 그들의 도움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본문에 나와 있다.
"나는 구차히 구걸하지 않았다. 그대들에게 재물을 보충해 주라고 메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단순한 "자존심 지키기"로 보면 곤란하다.
욥이 어떤 인물인가 동방에서 잘 나갔던 사람이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서 상당한 지위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단숨에 가장 비천한 지경이 되었다. 욥은 자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라고 보기 쉽다.
방문자들은 불쌍한 처지가 된 욥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욥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이 순간에 무엇일까? 아마도 먹고 마시는 생필품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방문자들은 그것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욥의 말 속에는 정말로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없다고 괜한 자존심을 지키려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에게.. 분명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먹을 것과 치료약을 주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럼에도 욥이 그와 같이 말하는 데에는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괜한 고집으로 도움도 받지 않으려 하고 힘들어도 안 힘든척, 배곯아도 안고픈척 하는 것. 그것을 자존심과 품위라고 부를 수는 없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방문자들은 욥의 범죄의 결과로 보고 있다.
욥은 자신이 그와 같은 고난에 처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욥의 고난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지 않았다.
방문자들은 욥을 과거에 큰 영화를 누리던 경건자가 은밀한 죄로 인해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고,
그래서 이제는 이웃에게 긍휼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욥에게 동정을 주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기만 한다면 이제 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욥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방문자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은 마치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현재의 처지에서 만족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에게 동정을 던져주고 있으나
자신은 설령 며칠을 더 굶고, 치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현재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큰 가치를 버리거나 타협하며 연명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자존심과 품위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진 핍박과 고난의 현장에서
잠깐 눈 한 번 질끈감고 그 위기 상황에서 타협하기만 하면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을텐데...
한국교회 초대 성도들이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아래에서
어떤 이들은 절 한 번(?) 하는 것이 무슨 큰 대수냐고 마음만 오롯이 갖고 있으면 되지 않냐고 강변하며 슬쩍 참배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이지만, 결코 마음도 줄 수 없고, 몸으로도 우상에게 줄 수 없는
참된 믿음, 거룩한 순교의 다른 이름으로써
가장 큰 자존심과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조금이라도 손상받지 않으려 기꺼이 목숨을 담보로 드렸던 분들이 있었다.
진리를 위해서,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서 기꺼이 불편과 부당한 대우와
배고픔과 배척을 당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고
신앙의 다른 이름인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
오늘날 현대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러한 성격의 자존심과 품위를 보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란 모든 조건이 넉넉히 갖춰지고 아무런 결핍이 없는 상태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고 비루한 처지에서 저절로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정황이란 것은 겉옷에 불과하다.
그 품속에 참 진리를 품고 있을 때, 그것을 끝까지 소중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언제나 그 자존심과 품위를 잃지 않게될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욥은 친구들을 향해서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라고 항변한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욥은 누가 보더라도 지금 가장 형편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 재물, 자녀, 아내 그리고 몸의 질병과 마음의 낙심...
어느 것 하나 소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방문자들은 욥의 처지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 대응책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찌해야할지에 대해서 말했다.
그 충고와 책망의 말을 다 듣고 욥도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이 본문은 욥의 생각과 방문자들의 생각이 불일치하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욥은 방문자들에게 "내가 언제 그대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였는가?"라고 묻는다.
욥의 요청으로 그들이 왔든 아니든 그 점이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방문자들은 분명히 욥을 어떤 식으로든 돕고자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욥이 그들의 도움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본문에 나와 있다.
"나는 구차히 구걸하지 않았다. 그대들에게 재물을 보충해 주라고 메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단순한 "자존심 지키기"로 보면 곤란하다.
욥이 어떤 인물인가 동방에서 잘 나갔던 사람이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서 상당한 지위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단숨에 가장 비천한 지경이 되었다. 욥은 자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라고 보기 쉽다.
방문자들은 불쌍한 처지가 된 욥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욥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이 순간에 무엇일까? 아마도 먹고 마시는 생필품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방문자들은 그것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욥의 말 속에는 정말로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없다고 괜한 자존심을 지키려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에게.. 분명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먹을 것과 치료약을 주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럼에도 욥이 그와 같이 말하는 데에는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괜한 고집으로 도움도 받지 않으려 하고 힘들어도 안 힘든척, 배곯아도 안고픈척 하는 것. 그것을 자존심과 품위라고 부를 수는 없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방문자들은 욥의 범죄의 결과로 보고 있다.
욥은 자신이 그와 같은 고난에 처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욥의 고난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지 않았다.
방문자들은 욥을 과거에 큰 영화를 누리던 경건자가 은밀한 죄로 인해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고,
그래서 이제는 이웃에게 긍휼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욥에게 동정을 주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기만 한다면 이제 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욥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방문자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은 마치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현재의 처지에서 만족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에게 동정을 던져주고 있으나
자신은 설령 며칠을 더 굶고, 치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현재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큰 가치를 버리거나 타협하며 연명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자존심과 품위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진 핍박과 고난의 현장에서
잠깐 눈 한 번 질끈감고 그 위기 상황에서 타협하기만 하면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을텐데...
한국교회 초대 성도들이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아래에서
어떤 이들은 절 한 번(?) 하는 것이 무슨 큰 대수냐고 마음만 오롯이 갖고 있으면 되지 않냐고 강변하며 슬쩍 참배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이지만, 결코 마음도 줄 수 없고, 몸으로도 우상에게 줄 수 없는
참된 믿음, 거룩한 순교의 다른 이름으로써
가장 큰 자존심과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조금이라도 손상받지 않으려 기꺼이 목숨을 담보로 드렸던 분들이 있었다.
진리를 위해서,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서 기꺼이 불편과 부당한 대우와
배고픔과 배척을 당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고
신앙의 다른 이름인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
오늘날 현대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러한 성격의 자존심과 품위를 보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란 모든 조건이 넉넉히 갖춰지고 아무런 결핍이 없는 상태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고 비루한 처지에서 저절로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정황이란 것은 겉옷에 불과하다.
그 품속에 참 진리를 품고 있을 때, 그것을 끝까지 소중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언제나 그 자존심과 품위를 잃지 않게될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