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어떤 설교자의 설교 내용이 성경 해석상으로 문제는 없으나 설교자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의 성경해석의 일부분을 설교에 인용할 수 있습니까?
답 : 세 가지 점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1. 첫째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작업과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의 차이
학문적인 작업과 설교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학문적인 작업도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글의 특성상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분석 비판하는 가운데 옳바른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다양한 이론과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해석과 그에 따른 일관된 적용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설교자는 교회의 왕되신 주님의 통치권을 대리 수행하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과정과 결과, 내용에 있어서) 그분의 통치권에 누가 되지 않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해석이 옳거나 인사이트가 있다고 하여도 불신자나, 이단자나 이설자의 해석이나 주장이 긍정적으로 설교에 인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2. 둘째로 장로교회정치적인 면에서 차이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은 공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일 뿐 공교회의 해석만이 보편성을 가집니다. 여기서 공교회의 해석이란 공교회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교리와 신조, 고백서, 문답 등과 그에 따라 교회 수용가능하다고 인정된 모든 신학작업의 산물들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성경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우리는 이단이나 이설이라고 판단합니다. 교회에 해를 가져오는 해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수업을 받은 설교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총회 혹은 교파의 공교회성과 그 신학과 고백의 내용들을 충실히 연구하고 이해하여 그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설교가 됩니다. 옳바른 혹은 기가막힌 해석이라 하더라도 공교회성 안에서 확인되었거나 혹은 보장받은 것이 아니라면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기준과 보편 가치성을 존중하지 않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소위 포스트모던적 사고입니다. 설교에서 설교의 텍스트와 설교자 사이를 분리하면 안됩니다. 설교는 인격성이 들어가 있고, 성령의 조명과 역사를 동반한 결과물입니다. 설교자도 그런 사고를 갖고 설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성경에서 비롯된 올바른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설교는 강연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거룩한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로서는 걸맞지 않습니다.
3. 셋째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점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용된 이교도들의 글은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로 주신 진리의 파편들입니다. 일반계시는 특별계시로 재해석해야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교도들에게 주어진 혜안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결과들입니다. 그들은 의도했든(의도라 했을 때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신들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의존성에 불과한 의도), 의도하지 않았든(전자에서 비롯되었으나 오히려 신들을 배격하고 부인하려는 반항적 의도나 오히려 인간을 그 자리에 놓으려는 의도조차) 하나님은 그들의 지혜와 수고들 속에 진리의 그림자, 파편, 편린들을 심어두셨습니다. 그러나 특별계시인 성경은 신자들만이(공교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연만물과 짐승이나 곤충들도 성경에 등장합니다. 이는 일반계시적 차원에서 나타내신 진리를 성령께서 특별계시를 해석하는 차원에서 인용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특별계시인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일반계시적 사건이나 철학이나 시등을 차용해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교리적으로 잘못된 사람의 해석이나 주장을 성경해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역하고 오용하는 것이며, 설교의 참된 목적에 비추어 볼 때도 맞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신자들에게 다른 편견과 오해를 주게 될 여지가 많습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가 누구이며 어떤 신학을 가진 사람인지 관계없이 누구나 옳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전제, 그리고 그런 해석을 따르거나 존중해도 괜찮다는 오해를 갖게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고가 우리의 앞선 세대로부터 교회가 도입했던 성경해석의 개인화, 소위 개인적 묵상과 큐티와 같은 무브먼트와 그것을 촉발하는 각종 자료들, 합법적으로 세움을 받지 않은 이들이 지교회를 돌며 성경교사가 되고 있는 현상들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한 지교회 신자들이 담임목사에게 성경과 신앙을 배우려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유명하다는 선생을 찾아다니거나 교회 밖의 다른 곳에서 신앙 지도를 받게되는 기이한 현상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라게 하기보다는 더 혼란스럽게 되고, 무엇이 기준이지 모호하게 되며 그것은 이미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안정적으로 확보된 교리 자체를 상대화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게 만듦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적 작업들, 자기만의 선생들을 둠으로써 지교회목회자들을 불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 강단에 대한 존중이 약화되게 만드는 것은 교회로서도 그렇게 한 신자 개인으로서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교회 안에서 확인되지 않은 채 기발하고 새로운 해석이나 이론들, 주장들의 위험성을 경계하시고 이미 완성된 교의와 표준문서와 그 해석들 더 나아가서는 당시의 수 많은 논쟁들 가운데 개혁신학과 장로교신학의 입장을 가졌던 성직자들의 수 많은 열매들을 찾아서 탐독하고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교부들의 신학과 만나게 될 것이고 속사도들 그리고 사도들의 기록으로서 계시라는 샘의 근원에 우리를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어려운 작업이고 우리가 벗어내야 할 많은 그릇된 사상과 시대성이라는 옷을 벗어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러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모쪼록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는 보다 진지하고 성실하고 끈기있게 이러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