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Magnalia Dei" "하나님의 큰일"에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해설하고 있다.
"악은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과 주변과 사회 속에만 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들을 없애고 사회를 개혁하면, 예를 들어 재산을 모든 사람에게 공동분배 하면 인간이 자연히 좋아질 것이다.... "
(삐아제를 필두로 한 인본주의 교육학이 가진 낙관적 세계관이 그렇다)
"....죄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이런 생각은 인간이 항상 죄책을 환경들에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정치적, 사회적 부패에 눈뜨게 되었을 때 그 생각이 영위하였고, 국가와 사회의 근본적 전복이 모든 악에 대한 유일한 치료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인간 본성이 선함에 대해서 냉정함을 되찾았다. 인간을 본성적으로 악하다 하고 그의 구원에 대해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고, 악한 가, 그리고 근대 과학 혁명의 최근 열매들이나 데카르트 이후 그리고 비트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 내린 "정의"(definition)는 인간이 가진 피조물로서의 독특성,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고귀성은 한낱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에 불과해 진 것이다)
".... 20세기에 와서 인간은 동물에서 나왔고 그의 마음에 있는 본래적인 것은 동물적이라는 것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죄는 이전의 동물적인 환경의 여파와 잉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욕망, 간음, 도둑, 강도, 살인 등이 매일 동물들에게 고유한 것들인 것처럼 가장 원시 인간에게 고유한 습관들이었고, 현재에 아직도 진화가 덜된 개인, 즉 소위 범죄자들 사이에 발견된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습관들에 다시 빠진 이러한 사람들은 특별히 범죄자들로 생각할 수 없고, 진화가 덜 되었으며 악하고 병들고 다소 미친 사람들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을 감옥 속에 넣어 벌할 수 없고 차라리 병원에서 치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동물적 상태에 기인하여 가져왔고 다만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진보적인 이들이 갖고 있는 죄에 대한 정의는 성경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이전 시대에서 죄란 것을 지금은 병이라고 하거나 개인의 인권의 문제로 돌린다. 그럼으로써 죄의 문제를 더 모호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바빙크는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다양한 종류의 사상들이 가지는 죄의 근원에 대해서 언제나 이르게 되는 종착지는 한 가지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 성경 계시의 정면적인 도전이다. 새 시대의 철학은 하나님 그 자체가 어두움이요, 본성이요, 혼돈이요, 빛이 그를 위해서 세계와 인간 속에만 들어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며, 구원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이요, 그는 인간에게서 그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모두가 이것만은 일치하는데, 그것은 죄의 근원과 자리를 피조물의 의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존재와 본질에서 찾고 있고, 따라서 그 존재와 본질의 원인인 창조주에게서 찾는다. 만일 죄가 환경과 사회, 욕망과 육체와 물질에 감추어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이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인 그 분에게 돌려질 수 있고 인간은 자유로워 진다. 그러면 죄는 타락으로 시작하지 않고 창조의 순간부터 새겨지는 것이다. 그때는 창조와 타락이 하나이며 그 존재, 곧 존재성이 죄다....."
(죄에 대한 정의는 이렇듯 단지 사회 문화적인 차원으로 내려져서는 곤란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모든 만물의 궁극적 원인자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려는 차원과는 극을 달리한다. 오히려 모든 죄와 곤고의 원인들을 하나님께 핑계함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런 깊은 전제와 사색이 없이 함부로 시대적 악의 문제에 대해서 규정짓는 일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악은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과 주변과 사회 속에만 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들을 없애고 사회를 개혁하면, 예를 들어 재산을 모든 사람에게 공동분배 하면 인간이 자연히 좋아질 것이다.... "
(삐아제를 필두로 한 인본주의 교육학이 가진 낙관적 세계관이 그렇다)
"....죄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이런 생각은 인간이 항상 죄책을 환경들에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정치적, 사회적 부패에 눈뜨게 되었을 때 그 생각이 영위하였고, 국가와 사회의 근본적 전복이 모든 악에 대한 유일한 치료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인간 본성이 선함에 대해서 냉정함을 되찾았다. 인간을 본성적으로 악하다 하고 그의 구원에 대해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고, 악한 가, 그리고 근대 과학 혁명의 최근 열매들이나 데카르트 이후 그리고 비트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 내린 "정의"(definition)는 인간이 가진 피조물로서의 독특성,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고귀성은 한낱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에 불과해 진 것이다)
".... 20세기에 와서 인간은 동물에서 나왔고 그의 마음에 있는 본래적인 것은 동물적이라는 것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죄는 이전의 동물적인 환경의 여파와 잉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욕망, 간음, 도둑, 강도, 살인 등이 매일 동물들에게 고유한 것들인 것처럼 가장 원시 인간에게 고유한 습관들이었고, 현재에 아직도 진화가 덜된 개인, 즉 소위 범죄자들 사이에 발견된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습관들에 다시 빠진 이러한 사람들은 특별히 범죄자들로 생각할 수 없고, 진화가 덜 되었으며 악하고 병들고 다소 미친 사람들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을 감옥 속에 넣어 벌할 수 없고 차라리 병원에서 치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동물적 상태에 기인하여 가져왔고 다만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진보적인 이들이 갖고 있는 죄에 대한 정의는 성경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이전 시대에서 죄란 것을 지금은 병이라고 하거나 개인의 인권의 문제로 돌린다. 그럼으로써 죄의 문제를 더 모호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바빙크는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다양한 종류의 사상들이 가지는 죄의 근원에 대해서 언제나 이르게 되는 종착지는 한 가지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 성경 계시의 정면적인 도전이다. 새 시대의 철학은 하나님 그 자체가 어두움이요, 본성이요, 혼돈이요, 빛이 그를 위해서 세계와 인간 속에만 들어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며, 구원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이요, 그는 인간에게서 그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모두가 이것만은 일치하는데, 그것은 죄의 근원과 자리를 피조물의 의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존재와 본질에서 찾고 있고, 따라서 그 존재와 본질의 원인인 창조주에게서 찾는다. 만일 죄가 환경과 사회, 욕망과 육체와 물질에 감추어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이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인 그 분에게 돌려질 수 있고 인간은 자유로워 진다. 그러면 죄는 타락으로 시작하지 않고 창조의 순간부터 새겨지는 것이다. 그때는 창조와 타락이 하나이며 그 존재, 곧 존재성이 죄다....."
(죄에 대한 정의는 이렇듯 단지 사회 문화적인 차원으로 내려져서는 곤란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모든 만물의 궁극적 원인자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려는 차원과는 극을 달리한다. 오히려 모든 죄와 곤고의 원인들을 하나님께 핑계함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런 깊은 전제와 사색이 없이 함부로 시대적 악의 문제에 대해서 규정짓는 일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